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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전재성
Subject   불교와 환경
불교사상과 환경문제
이글은 한국불교 환경교육원이 주체가 되어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환경위기시대 극복과 생태주의 운동 모색을 위한 지상 강좌를 정리한 것이다.
글 : 전재성
     - 한국불교대학 교수.

1. 첫머리에
불교에서 볼 때의 환경문제는 내적인 환경문제가 있고 외적인 환경문제가 있는데, 외적인 환경문제는 역시 내적인 우리의 정신적인 면에서 발생한다고 보고 내적으로 불교의 기본적인 교리, 사성제라든지 팔정도로 불교적인 명상 등을 어떻게 환경문제와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실제로 내가 독일에서 한 7년간 살았기 때문에 유럽의 환경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또 세계적으로 환경이념이 어느 정도인가를 많은 자료를 통해서 보아왔다. 인류가 어떻게 생존하느냐가 환경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특히 유럽에도 환경문제가 아주 심각해지니까 거기에 대한 정신적인 해결책을 불교나 도교에서 찾고 있다. 녹색당을 처음 일으켰던 페트라케리라는 여사가 있는데 자기 가족 중에 사랑하는 동생이 암으로 죽자 그 원인을 문명에 의한 공해에서 찾았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녹색당을 일으키고 환경운동에 투신하면서 활동을 해왔다. 결국 그는 외적인 문제를 가지고 싸우다 보니 정신적으로 피폐해지고 또 환경이론 가운데 발견되는 모순된 상황들 때문에 서로 투쟁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려운 입장 즉, 환경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입장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의 글을 보면 불교와 도교 쪽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고 동양사상에서 많은 것을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불교의 세 가지 괴로움(若)
특히 불교에서의 사성제 사상과 연기 사상이 이 환경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는 하나 이런 것을 어떻게 해서 실제 현대적인 환경문제를 파악하는 세계관 속에 집어넣을 것인가 하는 문제.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중생 심지어는 아주 작은 벌레에 이르기까지 자비를 베풀려 하는 불교의 사상이 있지만 그러한 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우주관하고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상당히 난해한 일이다. 그리고 실천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기도 하다. 불교의 기본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과 환경문제를 결부시켜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했다. 특히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모든 것은 ‘고(苦)’라고 했는데 이 모든 것이라는 것은 교리상 세 가지로 말하고 있다. 하나는 ‘고고성(苦苦性)’이라고 하며 직접 느끼는 괴로움으로 돌맹이를 맞았다든지, 길거리에서 넘어졌다든지 할 때 우리는 괴로움을 직접 느낀다.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즐거울 때도 있지만 우리가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느낄 때는 배가 고프다든지, 너무 덥다든지, 맞았다든지 할 때 느끼는 괴로움을 고고성이라고 한다. 또 하나는 ‘괴고성(壞苦性)’인데 괴(壞)자는 무너질 괴자로 이는 다른 여러 가지 사물들이 변해가고 죽고 하는 데서 느끼는 괴로움이다. 조금전에 말했던 페트라켈러리라는 녹색당의 당수를 역임했던 그녀가 사랑하는 여동생의 죽음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이 괴고성이다. 이렇게 보면 괴로움의 범위가 약간 확대된다고 복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가장 범위가 넓은 ‘행고성(行苦性 )’이 있다. 행고성은 우주 만물, 즉 모든 창조되는 것 또는 모든 조건 지어지는 것, 연기되는 것 말하자면 어떤 상관관계 속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이 괴롭다는 뜻으로 행고성이라 한다. 불교에서 볼 때 모든 것이 단독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합쳐져서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서 환경에 대하여 논하게 된것도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잘 적절하게 조화가 되어서 이렇게 참여를 했고 나 또한 한 시간전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다양한 조건들이 갖추어지고 결국에는 세계가 성립되는 것이다. 불교의 아비달마의 이론에는 이런 것이 있다. 어떤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능작인(能作因)이라는 것이 하나 있는데 이 능작인이라는 것은 이를테면 지금 여기서 이야기를 하는데 저 남극의 바다에 있는 고래나 상어와 나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볼 때 능작인이란 적어도 남극의 고래나 상어가 방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고, 또 내가 그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도움의 관계에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불교적으로 볼 때 우주의 만물은 서로 조화되어 있고 서로가 도와주는 관계에 있다. 즉, 모든 인과관계 속에는 능작인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전혀 관계가 없을 것 같은 데도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은 최소한 그


사물이 성립하기 위해서 방해하지 않는 원인을 제공한다. 방해하지 않는 도움을 준 것이다. 그래서 우주 전체는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 하나도 서로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런데 이 조건 지워져 무상하게 변하는 이러한 전체를 부처님은 행고성(行苦性)의 세계라 하여 괴롭다고 설명했다.
실제 이 괴로움이라는 것은 세계를 향해서 열리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괴로움이 있어야 비로소 무상함을 느끼고 만물이 서로 연관지어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으로 부처님께서는 괴롭다는 것의 거룩한 진리를 인식하는 순간에 바로 열반에 이른다고 하셨다. 우리는 보통 나 자신의 괴로움에 매달려 있고 최소한 내 이웃의 괴로움에 한정한다. 인간이 인간을 초월해서 동물에까지 자비를 베푼다든가, 동물의 괴로움에서 무생물의 괴로움까지 획득한다는 것은 매우 난해한 작업에 속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땅이라든가 흙, 물이라는 것이 괴로워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을까. 이는 우리가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불교와 유사한 그 당시의 자이나교에서는 실제로 이런 무생물들이 생명이 있다고 보았다. 땅, 물, 흙이 라는 것이 생명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생명이랄까 아니면 형이상학적인 실체라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괴롭다고 이야기했다.
부처님께서는 세 가지 괴로움을 알면 열반을 본다고 하셨다. 이 괴로움이라는 말에 대해서 나는 지금까지의 여러 불교학자들과 달리 새로운 해석과 정의를 내렸는데 산스크리트에서는 괴로움을 두카(duh+kha)라고 한다. 인도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말이 합쳐질 때는 여러 가지의 해석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육합석이라고 한다. 두카의 카는 영어의 car와 같은 뜻으로 자동차인데 여기서 두와 카가 합쳐졌는데 카의 본래 뜻은 태양에서 나오는 빛살을 말하는 것으로 수레바퀴와 비슷하다. 태양이라는 것은 진리를 이야기하는데 태양은 우주의 중심이고 우리의 내부에도 영원한 태양이 있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번뇌가 없는 영원한 태양이 우리의 몸속에 숨어 있는데 바고 그 영원한 태양을 발견하게 되면 바로 이 실제의 태양보다도 위대한 진리를 체득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태양이라는 것은 고대철학에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불교도 서양에서 처음 이해될때는 태양신화적인 철학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할 때 도가철학이나 불교에서의 ‘차크라’가 단저에 있기도 하고 척추에 있다고도 하는데 이것을 발견하게 되면 결국 해탈의 길로 가게 된다. 이 차크라는 태양의 빛살이 퍼져나가는 상태로 이것을 수레바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 법륜이라고 하는 것은 수레바퀴를 말하며 가르침의 수레바퀴라고 하고 태양의 수레바퀴라고도 한다. 태양의 바퀴는 빛이요, 진리이다. 그래서 이 두(dhu)라는 말은 나쁘다, 좋지 않다, 어렵다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카(kha)라는 말은 바퀴살을 말하는데 전차의 수레바퀴가 좋지 않으면 거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흔들리고 불안하고 괴로워한다. 그래서 이 두카라는 말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하는 불안이라든가 불안정의 뜻이라 하겠다. 우리가 심리적인 괴로움은 우주가 붕괴되고 있고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실제의 사태하고 자기 내부에서 느끼는 괴로움과 심리적인 문제, 형이상학적인 문제, 실존적인 문제와 종합되어 표현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이러한 의미가 있다.

3. 엔트로피와 불교의 우주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문제를 환경문제에서의 앤트로피의 문제하고 연관을 시킬 수 있는데, 알다시피 열역학의 법칙에 의하면 앤트로피가 계속 증가한다. 그것이 결국은 물질적인 혼란과 환경문제라든가 이런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과학적인 접근방법인데, 이러한 물질현상이 상당히 안정되어 있다고 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물질은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집합체이고 또 원자나 전자를 관찰하더라도 끊임없이 전자의 속도로(1초에 지구를 7바퀴 반 도는 속도) 움직이고 있듯이 물질은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이는 실체를 관찰해 보면 그것이 과장인지 입자인지 알 수가 없고 그것은 혼란도를 끊임없이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 정신이 혼란되어 있는 것보다는 물질 자체는 안정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이나 실제는 물질이 더 혼란도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예를 들면, 여기에 향수병이 하나 있는데 이 향수병의 뚜껑을 열면 향수가 날아가 버린다. 양수가 다 날아간, 냄새가 발산된 다음에는 더 이상 향수를 사용할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 그것은 뭐냐하면 에너지, 즉 향수의 에너지가 혼란도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이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수를 다시 모아서 재사용하기는 불가능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주의 모든 자연은 인가이 사용할수록 더 이상 사용이 불가능한 것으로 바뀌므로 재생이 안 된다. 그러면 혼란도가 증가하고 결국에는 멸망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세상은 결국 망하게 되어 있다. 우주는 망하고 생성되게 되어 있는 것이 불교적인 우주관이다.

그런데 그러한 우주의 생성과 멸망의 관계는 비단 그러한 큰 주기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순간의 모든 물질과 정신현상이 반복된다고 본다. 그러한 것을 ‘찰나멸(刹那滅)’이라고 하는데 그에 관한 이론을 ‘크샤나바다(ksanavada)’라고 한다. 찰나멸로 찰나찰나에 모든 물질들은 생겼다가 유지되었다가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찰나의 생성소멸이 연기적인 관계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자체가 결국은 혼란도의 증가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두카라는 말은 결국은 혼란도라는 말과 같다. 우주는 혼돈의 상태이고 괴로움의 상태이다. 여기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자각하지 않고서는 이 괴로움을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혼란이나 괴로움이라는 것은 물질적, 정신적인 것을 철저히 파악할 때만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괴로움을 인식하는 자만이 열반을 볼 수 있다.

4.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열반이라는 말은 유일하게 과국에 직면하고 있는 환경문제를, 인류의 정신의 문제를 구제할 수 있는 희망적인 단어가 아닌가 생각한다. 열반이라는 것은 불꽃이 꺼진 상태를 말하고 괴로움의 상태는 불꽃이 타고 있는 상태와 같으니 부처님은 세계는 불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번뇌가 불타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체가 타고 있는 현상이고 생명자체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의 고대철학을 올라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번뇌와 괴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였다. 그 고행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면 그 고행을 나타내는 말로 타파스(tapas)라는 것(열, 불)이 있다. 옛날에 불을 지피고 마찰열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찬목(鑽木)을 마찰했는데 이때 타파스는 바로 마찰열을 의미한다. 고행을 통해서 그 연기없는 불꽃을(그것은 지혜라 함) 일으켰는데 그 연기없는 불꽃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있다. 우리가 불꽃을 두 가지로 분류하면 연기있는 불꽃은 세속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산불같은 것이고, 연기없는 불꽃은 정신적인 지혜의 불꽃으로 엔트로피의 증가가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이 탄다는 것은 연기가 있는 불꽃을 말하고 있으며 번뇌와 엔트로피의 증가가 있다. 그리고 연기없는 불꽃, 열반에 이르는 길,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길이 분명히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혼돈에서 질서로 가는 길이다. 지금도 자연과학적 지식으로는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것이 ‘도대체 생명현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도 여기에 대해 발견한 것이 없다.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며 이 성스러운 영역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모든 조건지워진 것들은 폭포수와 갗이 흐른다고 한다. 전 우주를 폭포수의 폭류와 같다고 정의 했다. 불교에서 이를 규정하기를 다섯가지의 복잡한 작용으로 규정한다. 물질현상, 감수작용, 인식작용, 의지작용과 의식(잠재의식도 포함)이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우리 자신이 생명체라 알고 있는 것은 참다운 생명체가 아닐 수도 있다. 그래서 폭류처럼 흘러가는 물질현상과 마찬가지로 정신현상도 동시에 폭류처럼 흐르고 무상하고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두가 개별적으로는 참된 자아라 할 수 없으며 무아라고 한다.

5. 환경적 고통의 해결 - 사성제

그런데 생명현상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의문이 여전히 남는다. 그것은 마치 산 위에서 굉장한 속도로 폭류가 되어 흐르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그 밑에는 폭포수로 고여서 일순 정지하게 되는데 정지될 때에 말하자면 엔트로피도 감소되고 이것이 바로 생명현상이라는 것이다. 생명현상은 물질현상과 반대로 움직이며 엔트로피가 증가할수록 물질현상이 되며 혼란도가 감소할수록 생명현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그러므로 떨어진 폭포의 물이 고여 정지된 상태가 가장 고도로 생명현상이 충만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소위 환경운동이라는 것은 살기위한 운동이므로 산다는 것은 생명현상을 충만시키는 것이기에 그러기 위해서는 엔트로피의 감소와 혼란도의 감소로 가지 않을 수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환경에서 오는 여러 가지 생명파괴 현상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엔트로피의 감소를 유도하는 방법으로 물질적인 안락함을 추구하는 데서 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우리가 편안하기 위해서 다양한 욕구들을 채우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들어내고 생산할수록 실제로 그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거기에 따르는 정신현상을 복잡하게 만듦으로 엔트로픠 기하급수적인 증가를 가져와서 결국은 지구의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법은 괴로움을 없애는 길, 즉 혼란을 없애는 길로 가는 것이다. 이 괴로움을 없애는 길은 부처님이 명시하신 사성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성제라는 것은 모든 것이 괴롭다라는 첫 번째의 진리를 깨닫고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이 있으며 그것을 알아서 없애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엔트로피를 감소하는 것으로 그것은 열반으로 향하는 길이며 이 길이야말로 참다운 생명현상을 극대화시키는 길이다.

이 해석은 전통적인 해석하고는 다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참선을 한다. 마음을 정리한다고 하면 무기력해지는 것 아니면 정열의 허무를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생명현상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전환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바로 그 열반으로 이를 길이 있으며 그것을 팔정도라 말했다. 나는 사성제를 정확히 인식하는 길이 곧바로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불교의 많은 가르침 자체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윤리적인 차원의 이야기인데, 윤리적 차원으로는 환경문제의 형이상학적인 문제나 존재론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불교는 원래가 이 괴로움이라는 말 자체에서 그것이 심리적인 동기와 존재론적인 것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을 분명히 하지 않고서는 환경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참선을 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기했던 사람들은 많은 소유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환경파괴를 하지 않는다. 지금도 많은 스님들은 수행을 통해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 --

6. 땅은 땅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이치
부처님께서 환경문제에 대해서 아주 실질적으로 언급해 놓은 글이 있다. 그런데 아직 세계적으로 팔만대장경의 아주 방대하고 많은 보고들이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데 대부분의 불교이론들이 기본적인 개론의 반복으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부처님의 그 심오한 교리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것은 <중아함경>의 <근본법문경(根本法門經)>에 나와 있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번역자들이 어떠한 안목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본인과 같이 환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환경적으로 번역을 하면 새로운 경전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자들이여, 체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거룩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고, 참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리지 않아서 땅을 땅으로 여기라.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에 있어서 생각하고, 땅으로부터 생각하고, 땅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땅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또한 그들은 물을 물로 여기며, 물을 물로 여기고 나서, 물을 생각하고, 물에 있어서 생각하고, 물로부터 생각하고, 물을 내 것이라 생각하고, 물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또한 불, 바람, 생명현상에 대해서도 같은 식의 표현을 하고 있다).”
위의 경전에서는 지수화풍(地水火風)과 생명현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환경 문제는 인간이 탐욕을 가지고 인류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있었다. 유럽의 중세 때는 씻는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고 전 도시가 온통 쓰레기장이었으며, 페스트가 유행하면 전 유럽의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 실제로 도를 잘 닦은 사람은 목욕을 하지 않아도 건강하게 살았다고 한다. 어쨌든 인류의 역사가 생김과 동시에 환경문제가 있어 왔는데 여기서 부처님은 아주 간곡한 어조로 다섯 가지의 상황(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땅을 땅으로 여김은 잘못이며 땅에 대해서 대상적으로 생각함은 잘못이다. 부처님께서 지적하고 있는 환경에 대한 잘못된 인식 방법은 <근본법문경>에 따라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땅을 땅으로 여기는 것을 즉자적  파악, 땅을 생각하는 것을 대자적 파악, 땅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을 주관적 파악, 땅으로부터 생각하는 것을 소유적 파악으로 분류하여 상세히 기론해 보고자 한다.
첫째는 땅이나 물에 대해서 즉자적인 파악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실존철학에서 즉자적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환경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데 내가 한 번 시도해 보았다. 자연에 대한 즉자적인 파악은 이를테면 땅은 땅의 실체가 있다고 보는데 불교에서 땅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름 일 뿐이고 물질을 가진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는다. 땅이라는 것은 무한대로 열려 있는 무한자이므로 이름으로 제한하고 개념화함으로써 - (순간적으로 변하여 무엇이 될지도 예측하지 못하면서) - 그 대상은 마침내 죽어버리는 것이다. 땅이라는 것은 벌써 규정할 수 없는 무한자로서 모든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생태학적으로 밝혀진 것이지만 1g의 흙속에도 거기에는 삶의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미생물과 생물과 바람과 물이 있으며, 만약 거기에 물이 없다면 그것은 더 이상 땅이라 할 수 없다. 땅은 미네랄이나 철분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물이 있고 적절한 열이 있고 바람이 있기 때문에 땅은 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땅은 땅으로 여김은 즉자적인 파악으로, 대자적으로 열려서 온 우주와 관계하고 있는 땅을 단지 땅으로만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고 부처님은 이를 포착하고 계신다. 둘째는 땅에 대한 즉자적인 파악이 잘못이든지 또한 땅을(대상적으로) 생각하는 대자적 파악도 잘못이다. 왜냐하면 땅이 자기 자신의 실체를 가지고 다른 것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땅은 땅이라는 이름의 수많은 공동체와 관계를 맺는 환경집단이지 단위가 아니다. 즉 땅이라는 환경집단이 물이라는 환경집단과 관계를 가지며 그것은 대자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양의 실존철학적인 즉자적`대자적인 파악은 사물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
셋째로는 땅에 있어서 생각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땅에 대한 주관적인 파악이다. 우주에 대한 주관적인 파악의 오류에 대해서 몇 가지 지적을 하고 넘어가야 하는데, 고대철학에서 주관, 객관이라고 하는 말의 척도는 원래 ‘sine ira et studio'라는 말로서 이 말의 객관적인 뜻은 탐욕(ira)과 분노(studio)가 없는 것이고, 이것이 있는 경우를 주관적 파악이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객관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적인 대상이나 지식을 말하는데 과연 자연과학적 인식방법이 객관적인지 주관적인지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말했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출발부터가 도구의 사용이었다. 과연 아무런 도구도 없이 욕심도 분노도 없이 사물을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자연과학적인 관찰은 객관적이지 않고 주관적인 것이다. 오늘날 과학은 기계에 의존하고 있다. 기계적 활동은 합리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교활하고 편의주의적인 것을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적인 과정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배우는 것도 아니고 자연을 속이고 그것에 대항해서 기계화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를 위배하는 것이다. 오늘날 자연과학도들은 사실 자신들이 객관적으로 연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모든 동기나 전체 행위는 인간의 욕심이라든가 평의주의, 기계화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 기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자기의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한 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진정한 객관이라는 것은 ‘직관’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국 무한대로 열려 있는 자연을 도구 속에 가둬놓는 것이다. 마치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그물을 치고 그 그물에 물고기가 갇히는 것과 같이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인가이 탐욕의 그물을 던져서 그 그물 속에 갇힌 것만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 과학도 인간의 탐욕적인 주관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자연과학이라는 것도 객관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주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지 않나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탐욕과 분노로 출발한 자연과학은 당연히 엔트로피의 증가를 가져오지 않을 수 없고 혼란을 가속화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혼란을 가중하는 방향으로 인류를 이끌어 오지 않았나 하는 결론에 도달한다. 소위 우리가 땅에 대해, 물에 대해 대상적이며 주관적인 파악이 문제를 야기 시켜왔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땅으로부터 생각한다는 것으로 대상으로부터 생각한다는 말인데 결국은 객관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객관적이라는 것이 인간의 탐욕과 분노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수학적인 공식으로 전혀 인간의 의도가 없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수학적인 공식이란 인간의 계산된 교활한 의지가 들어 있으며, 대상을 양적이고 기하학적인 것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질적이고 양적인 세계가 배제되고 현실적인 생명이 서야 할 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물이건 땅이건 모두가 생명공동체인데 우리가 폭포수에서 흘러내리는 물에 농약이나 폐수가 섞여서 설악산 금강산에 흐른다면 누가 그것을 보고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하겠는가? 문학이라는 것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객관적인 파악의 오류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다섯째로는 위의 네 가지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간들이건 땅이건 물이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 (이것을 나는 소유적 파악이라고 생각하는데) - 자연에 대한 인간의 소유적 인식에서 환경의 문제가 유발되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수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소유적 파악이라는 것은 결국 경제가 우선이 되는데 경제적 지표라는 것은 인간의 인위적인 욕망과 편리함의 지수이고 개량적인 수치이지 모든 경제활동을 수치로 나타낼 수는 없다. 대표적인 것으로 경제지표와 환경지표가 모순이 되고 경제가 발달할수록 환경은 점차 파괴되며 환경지표가 점차 열악해진다. 환경지표가 열악해지면 당장 우리가 마시는 공기가 오염이 되고 내일 곧 죽을 수도 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마이너스를 주지 않는다. 공해를 뿜어 내고 환경이 오염될수록 경제는 발전하게 되어 있다. 자동차가 많이 생기고 공장이 즐비하게 들어서기 때문이다. 경제와 환경은 거꾸로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 후대에는 물을 사서 먹어야 하고 공기도 깨끗한 걸로 사먹어야 한다면 사실상 어떻게 보면 돈주고 이런 것들을 사먹지 않던 원시시대가 훨씬 경제지표가 높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선한 공기를 돈으로 다 환산하려면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제적 지표라는 소유적인 파악은 굉장히 모순이다. 모든 것을 다 계산으로 수치화 한다면 결국은 인간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만다. 수치로써 환산 - (객관적인 지표로서 파악하는) - 할 수 없는 다른 측면의 것은 무수하다. 그러므로 이런 경제적인 관념들이 자비의 관념으로 바뀌어야함을 알 수가 있다.

7. 불교의 생태적 사고
부처님께서는 또한 땅, 물, 불, 바람, 생명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파악해야 옳은지를 경전에서 마지막으로 밝히고 있다. “ 수행자들이여, 수행자로서 배우는 자이며 아직 마음이 성취되지 못하였으나 최상의 평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자라면 누구라도 땅, 불, 물, 바람, 생명현상을, 땅, 불, 물, 바람, 생명현상으로 여기고 나서,  땅, 불, 물, 바람, 생명현상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땅, 불, 물, 바람, 생명현상에 즐거워하지 말아야 한다.
왜?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래서 올바로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사람은 땅, 불, 물, 바람, 생명현상을 즉자적 대자적으로 주관적 객관적으로 소유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중지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탐욕, 미움, 어리석음, 혼돈에 따라서 즉자`대자적, 주관`객관적`소유적 의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이를 과감히 떠나야 한다. 이것은 난해한 경전으로 세계의 어느 학자도 이것에 대한 해석을 하지 못했는데 나는 이것이 환경문제와 깊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괴로움에 대해서 우리가 충분히 통찰을 한후에 이러한 환경문제에 대해 올바르게 보아야 한다. 연기적인 불가분의 관계이고 전 우주와 무한자로 연결된 무한자이며, 모든 것이 하나의 생명공동체이므로 그 자리에서 즉자적인 생각은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괴롭다고 하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고 이를 자비라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에는 세가지가 있다. <자비경>을 분석하면 나타나는데 불교는 매우 합리적인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은 나 자신의 괴로움이 전 우주적인 괴로움으로 확대되듯이 자비에는 전 우주적인 자비에서 우리 자신의 자비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첫째로 전 우주적인 자비심을 ‘anadhiso pharana'라고 하여 무한편만(無限遍滿)의 자비이다. 전 우주와 무한대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괴로움에 대한 인식 후에 무한편만의 자비 - (자비의 마음이 전 우주로 편만하게 가득 차는 것을 말함) - 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 다음은 ’ adhiso pharana'라고 하여 한정편만(限定遍滿)의 자비로 한정적인 어떤 것이 행복하길,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것은 인식의 전환이며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이를테면 남북통일이 되게 해 달라고, 가족이며 친지들과 자신이 편안하기를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무한편만으로 시작하여 자신의 이웃, 가족, 국가, 공동체, 지구로 그 영역을 한정하는 한정편만의 자비로 기원하고 명상한다. 이 명상은 우주에 대한 실상을 파악하는 방법이며 수행법이다. 마지막은 ‘dhiso pharana'로 방향편만(
方向遍滿)이라 한다. 이것은 특정한 어떤 방향을 정한 다음에 기도하는 것으로 동서남북이 있다. 신(神)들의 세계에서 특정지역에의 모든 방향으로 자비가 베풀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이다. 그러므로 기도를 할 때에도 공해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전 우주의 모든 존재가 잘 되기를 먼저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목적은 전우주가 잘 되기 전에는 그 목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런 것은 가장 좋은 환경철학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 <자비경>을 보면 우주의 모든 것이 행복하게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대승불교의 방향을 환경철학과 관련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자비의 사상은 괴로움에 대한 우주의 존재론적인 파악의 한 측면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실상이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칸트 같은 사람이 순수이성에 대한 규명을 하다가 못하게 되니까 실천이성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 윤리란 어떠한 존재이기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교는 자비를 통해서 우주의 존재론적인 실상인 괴로움이 하나의 존재론적인 해결책이고 파악이라고 보고 있다. 그것은 선악을 초월한 삶의 방법이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환경철학의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불교는 자비를 통해서 우주의 존재론적인 실상인 괴로움의 하나의 해결책이고 파악이라고 본다. 그것은
   선악을 초월한 삶의 방법이고 그것을 통해서만이 진정한 의미의 환경철학의 기초를 확보할 수 있다. --

8. 생태위기의 극복을 위한 진정한 실천
우리가 환경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환경문제의 전반적인 것이 어디서 출발했고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퐁퐁을 쓰지 말자’ 내지는 ‘노동운동과의 거친 결합’을 이야기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정신, 노동적 측면과 환경의 문제는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것은 참사람의 경지에 간 사람만이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주는 혼란의 경지로 가고 있는데 그 혼란이 감소하는 상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고 그 길로 가는 사람만이 참사람이다. 사실은 이 참사람이라는 것도 이름일 뿐이고 환경문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토론하는 것을 불교에서 현각(現覺)이라 하고 이는 여러 가지 상관들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말한다.
깨달음은 특별한 경지가 있다기 보다는 우주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다. 그런 이해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참사람이 가야할 길이고 그것이 어떠한 특정한 운동으로 해결되지 않는 환경문제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다.

불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일 강조되는 것은 괴로움의 시작인 인간의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이 욕심이라는 것 이외, 의욕이 있는데 쓸 데 없는 혼란을 일으키는 욕심을 버리되 의욕까지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의욕은 깨달음을 향한 의욕이라든지 우주의 실상을 알고자 하는 의욕은 아주 높이 사야 한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욕심을 제거하는 것이 열반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인데 그렇다고 해서 의욕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총체적인 것을 알면 알수록 아마 욕구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그 괴로움이라는 것도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이 있는데 우리가 웬만큼 괴로워 가지고는 괴로움이라는 게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많은 체험을 통해서 뼈저린 고통을 얻을 때만이 우주가 괴롭다는 것에 대해서 미미한 것이나마 알 수 있다. 하루는 부처님이 제자들과 갠지스 강가를 거닐다가 슬픈 표정을 지으시면서 한숨을 쉬시는데 제자가 궁금하여 그 연유를 물으니 부처님께서는, “이 수많은 중생들이 과거에 눈물을 흘렸고 또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그 눈물이 이 강물보다도 많고 저 오대양의 바다보다도 많구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파악하시는 괴로움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괴로움이었다. 부처님이 실제로 모든 것을 버리고 행동했던 것도 이 많은 중생들의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서였다. 괴로움에 대한 인식이 깊어질수록 자비로 전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욕망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여기서 ‘나’라는 것은 “이뭣고”라고 하여 의심나는 모든 총체적인 것에 질문해 보는 것이다. 본질이 없다는 것은 그 속에 영원불변하는 한정된 어떤 실체가 숨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땅을 말하면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영원불변하는 본질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나’라고 하는 영원불변하는 것이 우리의 몸속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무한한 우주 속에 열려있는 자아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영혼이라는 것은 불꽃과 같아서 나무장작을 지펴야 불꽃이 생기는 것과 같이 이 불꽃은 장작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실체니 하는 것이 있다고 보는 것도 지금 불꽃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윤회를 하게 되면 촟불에 있는 불꽃을 옮기는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 내가 먹는 음식이 어제 먹은 음식과 다르듯이 우리 몸의 구성성분도 하나하나 다르다고 볼 수 있으며 변해서 다른 사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일성의 법칙에 의해서 하나라고 보는 것뿐이다. 모든 상황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듯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는 것은 없다. 얼마든지 물이 될 수 있으며 땅의 공동체는 물의 공동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여러 조건들 사이의 관계성으로 관계가 없는 괴로움이 있겠는가?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은 관계성이 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든지 병이 있다든지 등의 관계성이 분명히 있어 그 관계성에 의한 괴로움이지 독자적인 괴로움은 없다. 그 관계성이라는 것을 서양철학에서는 사건이라고 하며 그 사건만이 실제하는 것이다. 관계성을 일으키게 하는 힘을 불교에서는 없이라고 한다. 궁극적으로 업은 의도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괴로움은 있어도 괴로워하는 자는 없다고 한다. 괴로워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착각일 뿐이니 괴로워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하면 더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그 방향으로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괴로움이라는 것은 그 순간으로 끝나며 그것으로 족하고 없어져 버리는데 자꾸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괴로운 것이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방법이 또 하나 있다. 하루는 부처님께 한 노파가 찾아왔다. 남편도 없는 그 노파의 외아들이 죽어서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다가 마지막 희망으로 부처님을 찾은 것이다. 부처님께 그 아들을 살려달라고 청하자 부처님은 “그러겠노라”고 대답을 하셨다. 만약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그 노파는 그 자리에서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는데 당신의 아들을 살려주는 대신 당신은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얻어오시오”라고 하셨다. 신이난 노파는 동네의 모든 집을 다니면서 사람이 죽지 않았는가를 묻고 다녔는데 결국 그런 집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다시 부처님을 찾아오지 않아도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모든 것이 괴롭다는 우주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회과학적으로 환경운동에 대한 규정도 없고 많은 환경운동이라는 것이 통일된 연관성이 없으며 생태환경운동의 논리적 근거나 철학적 근거가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공해반대 운동가들은 폐수의 방류를 억제한다든가 농약의 사용을 금지하라는 식의 지말적인 운동 등, 이미 나타나 여러 가지 모순이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방향인데 이러한 것들은 사실 총체적인 환경파괴와는 무관한 것으로 어떠한 영향도 주지않는 자기 만족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동일한 비판을 정신적인 운동이 아닌 실천적인 운동에도 펴 볼수 있다는 것이다. 폐건전지의 수집이라든지 퐁퐁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 등이 얼마만큼 환경문제의 해결에 실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해야 한다는 자기 만족적인 기여인 것이다. 실제적으로 많은 환경문제가 제도적이며 구조적인 문제가 99%이고, 실제 민간단체의 기여는 거의 없다. 환경문제의 커다란 줄기를 잡아서 제도적으로 바꾸려면 모든 사람의 정신적인 운동(정신적인 측면에서의 혼란의 문제와 물질적인 측면의 문제를 총체화 할 수 있고 운동화 할 수 있는 정신적인 운동)이 중요하다.
불교에서 참선을 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환경파괴를 하지 않는다. 참선을 많이 하고 정신적인 안정을 기했던 사람들은 많은 소유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명상을 해 왔던 성자들은 아무것도 없이 살아왔던 것이다. 많은 스님들은 수행을 통해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는 그러한 삶을 살아 왔고 살고 있다. 대표적인 예는 중국의 유명한 선사인 방거사는 속인이었을 때 아주 높은 벼슬에 있었는데 어느날 불교를 접하게 되고 깨달음을 얻은 뒤 그의 모든 재산을 동정호에 빠뜨렸다. 그러자 그것을 본 가난한 사람들이 “차라리 그것을 우리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면 좋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그 선사가 대답하기를, “내가 우주의 실상에 대해서 알고 진리를 깨닫고 보니 이 재산이라는 것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 그래서 이 더러운 것을 당신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하니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여기에 버립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우리 정신에 어떤 식으로 전환이 일어나느냐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지금 일본에는 청빈사상이 강조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으로 청빈운동이 일어나야만 그것이 결국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되고, 엔트로피의 증가를 막는 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깊이 있는 운동이 전개되지 않는 불모지에서 작은 지말적인 운동은 도저히 도도하게 흐르는 저 탁류를 막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폭력적으로 환경독재를 강요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깊은 정신적인 명상을 통해서 혼란을 감소시키고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는 경지로의 의식전환이 일어나서 자발적인 청빈운동이 되어야 한다. 엔트로피의 증가는 우주가 생긴 이래로 자연히 되게 되어 있지만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의 잘못된 가치관에 의해서(즉자적, 대자적, 주관적, 객관적, 소유적 파악 등) 특히 자연과학이 나타난 이래로 엔트로피의 증가가 가속되는 것은 인간이 개선할려고 하면 할수록, 그리고 환경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할수록 엔트로피의 증가는 가속된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왜 정신적인 명상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한 예로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한국불교사회연구소에서 <서원과 연대>라는 책을 펴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서 글을 쓰고 인쇄를 했는데 이것도 엄청난 환경문제를 유발시킨다. 차라리 환경단체가 없다면 이 만큼의 엔트로피의 증가는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결국 늪에 빠졌을 때 벗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엄청난 소비를 하면서 환경을 이야기하고 환경을 파괴하면서 환경문제로 먹고 사는 이익집단의 도구화가 되는 것이 잘못된 것인데 요즘 많은 단체가 그렇지 않나 생각한다. 모든 문제가 다 그렇다. 자연과학은 한 번도 우주를 총체적으로 파악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환경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오늘날 문제되고 있는 프레온 가스나 DDT 같은 것은 발견 당시에 세계를 놀라게 했고 사회적 기여를 했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지식이 완벽하지 못할 뿐 아니라 우주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과학도 마찬가지이다. 사회과학도 자연과학적으로 관찰된 자료를 종합한다든지 인간의 탐욕과 분노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인데 그런 것을 아무리 모아 봐야 언어를 초월한지관적인 통찰은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유일한 방법은 우주를 총체적으로 관찰하고 파악하는 방법은 결국 탐욕과 분노를 없애고 마음을 고요히 하고 언어를 떠나 무한자로서 모든것을 파악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비와 사랑도 가능한 것이고 진정한 환경운동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히려 청빈사상은 이런 심오한 사상과 연관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 것을 우리가 운동화시켜 나가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도 없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겠는가? 천천히라도 해결을 해야겠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을 서로 살려나가는 운동을 벌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마음을 안정시키고 질서를 향해서 나아가며 천천히 기회를 보면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엔트로피를 괴로움의 이론에 끌어들인 이유는 실제의 괴로움을 물질현상에 확대시켜 자연과학적인 문제라든지 환경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함이고, 환경의 문제와 그것은 불가분하게 정신적인 질서와 안정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참선을 하고 마음의 안정을 시키는 것이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또한 서양의 자연과학적인 이론을 동양적인 체계에 흡수하여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서구적인 사고방식과 개념적인 사유방식에 물들어 있고 모든 사람이 그 언어에 따라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 언어를 우리가 재정리하고 다시 체계화시켜서 잘못된 이론을 논파해 나가고 좋은 이론을 흡수시켜 옛날부터 있었던 직관적이고 총체적인 우주적 진리를 설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대화가 가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도 없고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도 없으니 그러한 서양의 방법론을 최대한 우리가 수용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수용의 측면에서 이데올로기화되고 집중화되면 그것은 다시 엔트로피의 증가와 환경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니, 최소한의 환경운동을 통해서 다수의 실천하고 명상하고 청빈하게 사는 사람들이 생기게 된다면 엔트로피의 감소나 바람직한 환경문제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데 있어서의 새로운 방향은 분명히 심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경오염과 숲의 파괴
                  전재성(한국불교대학 교수)
        
Ⅰ. 부처님의 예지
“수행자들이여, 체험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은 거룩한 이를 인정하지 않고 거룩한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거룩한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고 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참 사람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지지 않아서, 땅을 땅으로 여기며 땅을 땅으로 여기고 나서 땅을 생각하고 땅에 대하여 생각하고 땅을 좇아서 생각하며 ‘땅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며 땅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은 그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또한 그들은) 물을 물로 여기며 물을 물로 여기고 나서 물을 생각하고 물을 좇아서 생각하며 ‘물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며 물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들은 또한) 불을 불로 여기며 불을 생각하고 나서, 불에 대하여 생각하고 불을 좇아서 생각하고 ‘불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며 불에 대하여 즐거워한다. 왜? 그가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들은 또한) 바람을 바람으로 여기며 바람을 바람으로 여기고 나서, 바람을 생각하고 바람에 대하여 생각하고 바람을 좇아서 생각하며 ‘바람은 내것이다’고 생각하며 바람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그들은 또한) 자연을 자연으로 여기며 자연을 자연으로 여기고 나서 자연을 생각하고 자연에 대하여 생각하고 자연을 좇아서 생각하며 ‘ 자연은 내것이다’고 생각하여 자연을 즐거워한다. 왜? 그들이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한다.”
환경오염은 자연의 전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있다. 우리는 자연 없이는 한 순간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데도 자연을 즐기고 어울리고 감상하는 데에만 전념하고 있다.
1989년 10월 26일자 경향신문에 아래와 같은 기사가 보도되었다.
“동자부는 26일 대기오염의 주원인인 이산화황(SO2)이 서울의 경우 83년의 0.051ppm 에서 지난해 0.062ppm으로 환경청의 환경기준치 0.05ppm을 넘어섰으며, 공기중에 떠다니는 분진도 m3당 179마이크로그램으로 기준치 150마이크로그램을 웃돌고 있다고 밝혔다. 대구의 이산화황 오염도도 1.052ppm으로 기준치를 넘어섰으며 ()山은 기준치 이하인 0.044ppm으로 나타났다. 분진도는 부산․대구가 각각 244 및 155마이크로그램으로 모두 기준치를 넘어섰다. 지난해 이같은 대기오염치는 세계보건기구(WHO)가 정한 이산화황 기준치(0.022ppm)이나 부유분진 기준치 m3당 90마이크로그램을 크게 초과하는 것으로, 석탄․유류 등 화학에너지를 편중․사용하는데 가장 큰 원인이 되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위에서 이산화황이 공기오염의 주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으나, 실제 이산화황을 매출시키는 공해요인은 모든 생물과 자연에 심각한 해를 끼치는 이산화질소(No2)도 방출하며, 부유분진은 분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체에 극히 해로운 중금속을 또한 함유하고 있어서 공기오염은 전 생태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생류가 의존하여 살고 있는 들과 산의 숲을 파괴시키고 있던 인류의 생존기반을 그 뿌리로부터 뒤흔들고 있다. 먼저 우리는 산업사회에서 점증하는 공기오염이 어떻게 숲을 파괴시키는가를 설명하기에 앞서 숲과 인간, 대자연과 인간의 상보적 유대성부터 살펴보아야 가공할 만한 자연파괴가 인간에게도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Ⅱ. 숲의 다양성과 조화

숲은 도시생활자에게 있어서나 농촌에 있어서나 인간이 휴식하고 또한 홀로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숲이야말로 인간에게 ‘자연의 삶’을 제공해주는 마지막 보루로 인간앞에 놓여져 있다. 숲은 옛부터 많은 동물과 식물의 생활공간이었고 지금도 모든 동식물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난초에서부터 거대한 낙엽수나 침엽수에 이르기까지, 또한 개미에서 코끼리에 이르기까지 많은 생류의 서식처이다. 이러한 많은 동식물의 왕국인 숲을 거닌다면 우리는 끝없는 경이에 사로잡힐 것이다. 봄에는 자연의 다양한 색깔과 새들의 지저귐으로 모두가 매료되며, 여름과 가을에는 그 풍성함에, 겨울에는 대지를 지키는 인고의 강인함을 모두가 맛볼수 있다. 숲은 특히 인류에게 있어서 삶의 공간일 뿐 아니라 모든 체험의 공간이었다. 그림․음악․시․종교 등의 일회적 영감체험의 장소였던 것이다. 숲은 특히 우리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도가사상의 온상이었다. 대자연의 숲을 빼놓고는 시와 서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대자연의 마지막 보루인 숲을 파괴할 권리가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져 있지 않다. 숲속에서 삶의 순환은 아주 잘 질서지워진 조화를 드러내고 있다. 푸른 풀과 나무들은 광합성 작용을 통해서 물과 탄소와 미네랄, 에네르기를 얻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숲과 나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원천적인 생산자이다. 광합성은 생화학적 과정으로 물(H2O)과 공기 중의 탄소(CO2)를 햇빛의 힘으로 당분과 산소로 바꾸는 작용이다. 오로지 녹색의 엽록소(chlorophyll)만이 이러한 반응에 응할 수 있다. 이 광합성이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살 수 있는 전제조건이다.
                  엽록소
물 + 탄소(CO2)  ―――――→ 산소(O2) + 당분
                   햇빛
이 녹색의 엽록소를 가진 식물에 인간과 모든 동물이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살기위한 에네르기를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식물로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식물로부터 자신을 부양하기 때문에 ‘소비자’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제3의 그룹으로 ‘환원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이들 동식물의 시체를 다시 물과 탄소와 미네랄로 환원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박테리아․곰팡이, 땅과 공중의 미생물 들이다.이들 환원자들과 소비자들은 생산자의 광합성 작용에서 생겨나는 산소를 받아들여, 거꾸로 자신들의 호흡작용과 환원작용에서 생산자인 식물이 광합성에 필요로 하는 탄소를 방출한다.
              
                산소



식물                동물,  인간, 미생물

                       ←


                탄소

숲에서의 동물과 식물의 삶과 인간의 삶은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건강한 숲은 완전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쓰레기가 없다. 모든 것이 삶을 위해 다시 쓰여지고 있다. 완전한 재이용의 구조가 발견되며 성장과 소멸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전체적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숲은 많은 환경구조 가운데 하나이며 어떠한 환경구조도 스스로를 위해서만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개체의 삶을 한 환경구조 내에서 서로 연관되어 인연지워져 있고 또한 환경구조는 다른 환경구조와 서로 상보적이며 교환적인 의존관계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인공식수에 의한 산의 숲은 이러한 상보적인 연기관계의 삶의 구조로부터 소외되어 있어 본래의 건강한 원시림에 가깝다고 볼 수가 없다. 혼합림에서 볼 수 있는 상호교환적인 삶의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수익만을 목적으로 하는 단일 수종의 경제림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림은 특히 병충해에 약하기 때문에 농약의 살포 등 환경오염의 악순환의 구조속에 말려든다. 그러나 원래 혼합림으로 되어 있는 원시림은 해충으로부터의 피해가 적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천적이 있더라도 그 천적에 대한 식량의 공급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바람이나 눈보라 등의 악천후에 의해 피해가 극히 적다. 혼합림에서는 자연의 젊어짐 - 새로운 나무가 늙은 나무의 씨앗에서 자라나는 것 - 이 상존함으로써 또한 숲의 환경구조의 변화에 잘 대처하여 그러한 피해가 또한 적은 것이다. 자연의 젊어짐과는 반대로 어린 나무의 의도적 식수는 병충해의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훨씬 많은 것이다.
그리고 숲이 인간에게 베푸는 직접적인 역할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는, 소음방지를 들 수 있다. 숲은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소음방지 구조이다. 모든 잡음은 잎사귀와 나무가지에 부딪혀서 반사되지 못하고 사라져 흩어져버린다.
둘째, 휴식처로서 숲은 모든 생류에 불가결한 가장 좋은 장소이다. 고요함과 신선한 공기, 잘 조화된 온도, 비와 눈보라를 피할 수 있고 또한 여러 동식물의 다양한 삶을 체험할 수 있다.
셋째, 원료 및 약초의 공급처로서 식량인 딸기․버섯 등을 비롯하여 각종 약초․목재 등을 공급한다.
넷째, 일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산업사회에 필요한 목재 및 약초․식량을 공급함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다섯째, 환경보호의 측면에서 볼 때 숲에 사는 많은 새들과 곤충들은 농사를 짓는 데 해로운 많은 해충들을 없애준다. 또한 많은 동식물의 보호처이자 은신처가 되어 준다.
여섯째, 공기를 정화하는 역할을 한다. 숲은 오염된 지상의 공기에 대한 가장 탁월한 공기필터의 역할을 한다. 숲의 나무들은 바람에 날리는 분진․탄가루 및 각종 공해물질을 잎사귀에 붙였다가 땅에 저장한다.
같은 시간에 평지보다 숲에서 공기를 정화시키는 양의 20배 가량이나 높다.
일곱째, 미세기후(微細氣侯)에 좋은 영향을 준다. 숲에서는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바깥보다 시원하거나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며 평지나 도회지 보다 덥거나 보다 찬 기후의 공기와 대류현상을 일으켜 주변의 도회지나 평지의 기후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여덟째, 물을 정화하고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숲에 나무뿌리가 있는 땅은 필터역할을 하여 물을 걸러 맑은 물이 되게끔 할 뿐 만 아니라, 또한 땅의 물을 보존하는 능력을 증대시켜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홍수를 일으키지 않으며, 가뭄이 들어도 보존된 물을 일정하게 방출함으로써 가뭄의 재해를 방지한다.

Ⅲ. 공해로 인한 숲의 병듬
환경의 파괴로 인한 공기오염으로 숲은 전  세계적으로 병들어 가고 있다. 나무가 병든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침엽수의 바늘이 떨어져나가거나 색깔이 바래지면서 나타난다. 중요한 나무가 공해로 인해 병든 특징은 아래와 같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북구라파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며, 공해가 심한 대도시 주변의 산이나 도시의 공해가 구름이 되어 그 구름이 산머리에 부딪혀 산성비가 내리는 곳. 우리나라의 경우 주로 산맥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한 지방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잣나무의 경우 중간이나 아래에 있는 침엽관(針葉冠) 부분이 생기게 되어 빛이 새들어가며 때로는 윗부분의 침엽관 마저 빛이 통하게 된다. 그리고 키가 너무 크게 자라며 예비 봉우리가 가지를 내어서 새로운 광합성을 시도한다. 줄기는 조밀하고 단단하게 갈라지는 솔방울들을 갖지 않으며 동일한 갈색이 아니다. 소나무의 경우도 잣나무와 비슷하게 되어 빛이 통과해 침엽이 탈색되어 회색이나 노란색․갈색으로 변하고 때로는 침엽관 전체가 죽는다. 특히 소나무가 병든 것이냐 아니냐를 가리는 기준으로 비둘기크기의 새가 침엽관 속에 들어가 완전히 숨을 수 있느냐 하는 준거틀이 있다. 만약 비둘기가 침엽관 속에 완전히 숨을 수 있다면 건강한 소나무이고 그렇지 않으면 병든 것이다. 침엽수가 병든 것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과학적인 것은 침엽나이에 의해서다. 침엽나이는 잣나무가 15년 정도이고 소나무가 3~4년인데 병든 것은 훨씬 적다. 낙엽수의 경우에는 침엽수보다 공해에 대한 피해가 장기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참나무의 경우에 엽관(葉冠)의 잔가지가 죽어서 빛이 스며들며 밝은 녹색으로 빛이 탈색되며, 잎사귀가 일찍이 낙엽현상을 일으켜서 잎의 분포가 불규칙하게 된다. 너도밤나무 같은 경우도 엽관에 빛이 스며들고 잎사귀에 불규칙한 반점이 나타나고 잎의 크기가 작아지고, 병든 잎은 위로 서로 접혀지려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병든 나무에 있어서 공해로 인한 피해로 나타날 수 있는 장애현상이 나무의 나이테의 성장율이 점점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병든 침엽이나 잎사귀가 떨어질기 훨씬 이전에 공해에 시달린 나무는 환경에 대한 저항성을 점차로 상실하게 되며 나이테에 따른 나무의 성장을 매년 둔화시킨다.

Ⅳ. 숲의 파괴원인
숲이 파괴되는 주요한 원인은 공기오염과 그 속에 포함되는 공해물질에서 유인된다. 공기오염의 공해물질은 주로 화석화된 에너지인 기름․석탄․가스를 연소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특히 그 가운데 위험한 것은 이산화황(SO2)과 산화질소(NO2) 또는 그와 유사한 물질의 발생에 있다. 구체적으로 이산화황은 화력발전소 및 열관리설비에서 가장 많은 50~60%가 발생하며, 그밖의 일반산업체에서 30~40%정도, 가정용 연료소비에서 10%정도, 자동차와 교통공해에서 5%정도 발생하는데 비해, 산화질소는 거꾸로 자동차 및 교통공해에서 가장 많은 60~70% 가량이 발생하며 화력발전소나 열관리설비에서 20%정도, 그밖의 산업체에서 20%정도이며 가정용 연료사용에서 5%정도이다. 이러한 이산화황이나 산화질소는 가스의 상태로 공중에 부유하며 공중에서 수분을 만나서 거기에서 황산이나 질산이 형성한다. 이러한 황산이나 질산이 비나 안개나 눈․서리․이슬 등을 오염시키게 되는 것이다. 특히 산화질소는 공기중에서 햇빛의 작용으로 오존(O3)을 형성한다. 이때 특히 탄산수나 강한 햇빛이 존재할수록 그 반응을 가속화시켜 오존의 생산을 증대시킨다. 이때 오존은 생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신진대사를 파괴시킨다.

                            햇빛
산화질소(SO2) + 산소(NO2)   ――――――――――→   오존(O3)
                            탄산수

이때 발생된 오존은 특히 숲을 황폐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공해요인들은 대류현상에 의해 공장지대․인구밀집지대․교통공해지대에서 숲이 있는 산으로 전이된다.(※)
(※ 이때 주의할 사항은 공기중의 오존(O3)은 생류에 극히 유해한 반면 지상 20~24km에 있는 오존층은 햇빛에서 오는 해로운 단파나 초단파를 차단해 주므로 유익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상에서 발생하는 오존과 이 오존층과는 아무런 대류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오존층마저 유감스럽게 곤충살포제, 냉장고의 프레온가스 등의 화학물질에 의해서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밖의 중요한 공기오염으로 플르오르의 화합물질들이 있는데, 그것은 알미늄의 포장이나 벽돌공장, 쓰레기의 소각처리에서 생겨나서 식물들의 잎사귀나 침엽에서의 신진대사를 방해한다. 또한 중금속인 납․카드뮴․아연등이 있는데 열기관․금속포장업체․쓰레기처리장․중화학공업단지에서 대량으로 방출되며, 동일물의 신진대사에 이상을 일으키며 다른 공해원인과 더불어 그 해악을 가속화시킨다. 점점 늘어나는 산성비에는 점점 더 많은 중금속이 포함되고 있어 더 많은 중금속이 포함되고 있어 그 중금속과 산성물질의 화학반응이 생체에 미치는 악영향이 증대되는 것이다. 특히 중금속은 해체될 수 없으며 생체내 또는 땅속에 축적되어 항구적으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교통공해에 있어서 납성분을 함유한 휘발유인 트리에칠블라이(Triethylblei)는 자연과 인간에게 아주 유해한 것이다. 그밖에 에틸렌과 같은 탄화수소 계통의 화합물질들은 나뭇잎과 침엽을 직접적으로 병들게 하며 성장을 저해시킨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오존의 형성과 이산화황이나 산화질소를 산으로 전이시키는 데 공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중요한 것은 원자력 발전소 주위에 있는 숲은 점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방사능에 오염된 희(希)가스류가 유출되어 이산화황이나 산화질소를 식물에 아주 해로운 산으로 만들거나 그러한 과정에서 오존의 생성을 촉진시키기 때문이다.

Ⅴ. 숲속에서의 공해물질의 영향
숲의 초목이 병드는 현상은 공해요인에 대한 숲의 오랜 만성적 중독현상이다. 직접적으로는 식물의 광합성 작용을 방해함으로써 생물의 원천적 에네르기를 고갈시키는 현상이다. 나뭇잎이나 침엽은 그 고사(枯死)를 면하기 위해 수분층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수분층이 산성화된 안개나 비․이슬 등에 접촉되면 황산이나 질산의 엷은 막이 형성되어 엽록소를 파괴시킨다. 또한 이때에 발생하는 오존은 식물의 심층까지 파고들어 그들의 생장점을 바로 파괴시켜 버리고 만다. 그리고아황산가스나 산화질소 또는 다른 공해원인들은 산성화되지 않고도 바로 식물의 잎의 숨구멍(氣孔)을 통해 세포 속에 들어가 신진대사에 관여하며, 이때에 영양분들이 공해원인과 반응을 일으켜 제거되어 버린다. 또한 세포의 숨구멍 여닫이 운동에 장애가 일어나 많은 수분이 방출되거나 탄소동화작용에서 산소와 탄소의 교환이 원할하게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특히 이산화황이나 이산화질소 기타 각종 공해요인(중금속 등)을 함유한 산성비나 이슬 안개들이 땅위에 내리게 되면 땅 속의 알카리성 토양을 중화시키면서 많은 비료성분을 유실 내지 제거시킨다. 그뿐만 아니라 산성화의 진해과정에서 땅 속의 미네랄 성분 가운데 알미늄 이온(Al+3)을 분해시켜 용출시킨다. 이 알미늄 이온은 지하 생태계에 아주 유해한 해악을 끼친다. 그것으로 인해 지렇이와 많은 유익한 박테리아가 소멸되며 식물의 잔뿌리들이 파괴되어 토양의 황폐화가 촉진된다. 그 황폐화 과정은 특히 잔뿌리와 균사류와 박테리아의 삶의 공동체가 파괴되면서 진행된다. 지하의 균사류(Mykorhize)는 식물의 잔뿌리의 안정을 위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균사류는 이 잔뿌리를 둘러싸고 있으며 거기에 기생하고 있는 박테리아들과 함께 식물의 뿌리에 수분과 영양분, 미네랄 등을 공급하며 그들은 나무로부터 특정한 신진대사물을 섭취한다. 이 뿌리의 삶의 공동체는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여 토양의 산성화로 인해 그 잔뿌리 공동체가 파괴되면 지상의 식물은 죽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잎사귀와 뿌리로부터 공해의 피해를 입는 나무는 환경에의 저항능력을 상실하고 병원균에 감염되기가 쉬워지며 서리․바람․눈보라 등의 악천후에 견디기 어려워진다. 특히 더운 여름에 너무 수분의 증발이 많아져서 고사하는 수가 많다. 그밖의 땅의 산성화를 방지하고 그로 인해 병충해의 피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농약과 비료의 사용은 공해요인 자체와 더불어 지하수를 오염시키고 있으며, 지하수는 모든 강물을, 모든 강물은 나아가서 바다를오염시키고 결과적으로 중생에 필요한 모든 물과 식량을 오염시키고 있다. 땅이 산성비나 산성 이슬․서리․농약 등에 의해 산성화된다는 것은 동시에 땅의 중금속 오염도가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물에 흡수되어 심각한 기능장애를 일으킨다. 만약에 땅의 중금속 오염이 즉가 중지되지 않는다면, 세계는 50년 안에 먹을만한 식량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산성비와 그에 용해된 중금속인 알미늄․동․카드뮴․아연․납등은 하천수와 호수의 물을 오염시켜 수중생태계를 파괴시킨다. 하천이나 호수의 생태계도 자연의 피돌기 구실을 담당한다. 하천․호수의 프랑크톤․물고기․식물들이 죽어가면 하천과 호수는 죽은 물의 저장소가 될 것이며, 이 죽은 물은 바다를 또한 죽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공기오염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기관지질병․후두염을 일으키고, 심장병이나 천식을 앓는 어린이나 노인에게 극히 해롭다. 폐암의 유발은 바로 이 공기오염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 또한 어린이에게 위험한 위막성후두염(僞膜性喉頭炎)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Ⅵ. 열대원시림의 파괴와 인류의 장래
제3세계에서의 숲의 파괴원인은 제1세계에 있다. 제1세계의 복지사회․경제성장․기술혁신을 위해 필요악의 대가로 치르고 있는 환경공해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열대원시림의 파괴에 있다. 열대원시림의 원목은 선진국으로 값싸게 팔려 나가고, 채벌된 원시림은 불에 태워져 목장이나 농장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목장이나 농장은 대부분이 유럽이나 미국 등 선진국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작용하는 것은 다국적 기업의 이권이다. 브라질의 원시림만 해도 매년 수천 헥타르의 숲이 소의 목축을 위해 불태워진다. 그것은 단지 대량의 육류소비의 수요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전 세계가 산업화되기 이전에 존재하던 원시림의 42%가 이미 회복불가능하게 파괴되어 버렸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매초당 축구장 만한 원시림이 채벌되며 황폐화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원시림의 파괴속도가 그대로 진행되면, 2020년에 가서는 지구상의 모든 원시림이 자취를 감추고 말 것이다. 이러한 원시림의 파괴는 지구상에 예측할 수 없는 무서운 변화를 초래할 것이다. 열대의 원시림은 어마어마한 수분과 연료를 함유하고 있다. 그것이 지구상의 기후의 안전성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원시림의 파괴로 대량의 물을 유출시키면서 땅을 황폐화시키며 가뭄현상을 유발시킨다. 지하수면을 하강시키고 강수량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며, 나아가서는 토양의 황폐화․사막화로 이끌면서 그 지역의 농산물 생산량도 역시 급격히 감소시킨다. 북아프리카와 북브라질에서의 극심한 가뭄과 기아현상은 이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원시림이 화전(火田)화 되는 과정에서 대량의 탄화물이 소화되고 산소를 소모하면서 많은 탄산가스가 발생하며, 수많은 산소를 방출하는 녹색식물을 잃게 된다. 그러한 현상은 대기의 조성에 변화를 가져온다. 대기중 탄산가스의 양은 점점 늘어나고 생류에 꼭 필요한 산소의 양은 점점 줄어든다. 이런 경향은 석유․석탄 등의 중화학공업에서 발생시키는 엄청나 탄소가스 및 공해요인으로 가중되고 있다. 공기조성의 변화는 가중되고 있다. 공기조성의 변화는 지구상에 온실효과를 가져와서 지구 전체의 온도를 상승시켜 빙산이 용해되고 바다의 수면이 상승하면서 경작지 면적을 점점 감소시킨다. 원시림의 파괴는 동식물의 유전적 환경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쳐 최근 20여년간 지구상에 존재하는 300만 내지 천만 종류의 생류 가운데 적어도 50만 내지 60만 종류가 소멸도 있었다. 커다란 거목들이 있던 숲과 그곳에 살던 포유류․새들․곤충들 - 세상에 유일했던 아름다운 기적들이 영원히 우주에서 사라져 버린다. 열대 원시림에는 연구되지 않고 그 가치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동식물이 있어서 약초․과일․육류․목재 등의 안정적 공급처였다. 그러나 숲의 파괴와 종의 감소는 먹이연쇄의 사슬을 파괴시키고 생태계의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Ⅶ. 결론
이제까지 서술한 내용을 좀더 간략히 하여 도표로써 숲과 환경 공해의 연기관계(緣起關係)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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