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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관리자
Subject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전재성 (한국빠알성전협회 대표)


                                           목 차

I. 서 론
II. 자아와 무아의 스펙트럼
   1. 자아의 스펙트럼
      1) 초기불교에서 사용된 자아
      2) 서양철학의 자아 개념
   2. 무아의 스펙트럼
      1) 무아사상의 토대
      2) 무아의 스펙트럼
III. 무아적 자아의 윤회
IV. 결론


I. 서 론

자아라는 개념은 인류역사상 고대 인도에서처럼 철저하게 탐구되었던 적은 없다. 우파니샤드의 자아의 의미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까지 심화되고 확장되었다. 서양고대철학과 중세철학에서는 자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영혼이나 육체나 의식이나 이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밝혀낼 수 있었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근대의 데카르트에 와서 비로소 최초로 자아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생겨났다. 그 이후 서양의 철학과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발달로 다양한 자아의 스펙트럼이 형성되었다.
그런데 범아일여의 사상으로까지 극도로 무르익은 인도의 자아개념은 초감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는 것이고, 근현대의 다양한 서구적 자아의 스펙트럼은 경험적인 것이긴 하지만 정신ㆍ신체적 요소인 존재의 다발[五蘊]의 어느 하나나 일부로 그 자아를 환원시키는 방식으로 그것을 미세하게 심화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양이나 서양이나 기본적으로 자아개념을 나, 실체, 영혼, 정신의 개념과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그러나 2500 여년전의 초기불교의 자아의 개념은 그러한 인도의 초월적 형이상학적인 자아의 개념이나 서양의 근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의 자아개념보다도 원리적으로 훨씬 심오한 관점을 처음부터 추구했다. 너무 심오한 나머지 무아라고 불리는 그것을 우리는 ‘무아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II. 자아와 무아의 스펙트럼

1. 자아의 스펙트럼

1) 초기불교에서 사용된 자아

초기불교에서 사용된 자아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A.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
B. 타아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아
C. 정신ㆍ신체의 한 부분과 동일시되는 자아

A.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

고대 인도의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우파니샤드적 자아는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유형상유한(有形狀有限)의 자아, 둘째 유형상무한(有形狀無限)의 자아, 셋째 무형상유한(無形狀有限)의 자아, 넷째 무형상무한(無形狀無限)의 자아에 대한 시설로 요약해볼 수 있다. 이 가운데는 물활론적인 관점과 형이상학적인 관점이 혼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대 인도인들이 도달했던 어떤 경험적인 정신적 상태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한 것에 근거한다.  

① 유형상유한의 자아
󰡔카타카 우빠니샤드󰡕에 보면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의 신아(神我)를 자아라고 하고 있다. ‘엄지손가락만한 신아(神我)가 있어 내부의 자아로서 생류들의 심장 속에 잠복한다.’ 이 생류의 심장 속에 있는 신아야말로 자아의 본질로 오늘과 내일에 걸쳐 동일인인 영원한 자아라고 보는 것은 유형상유한의 실체적 자아이다.

② 유형상무한의 자아
동일한 󰡔카타카 우빠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이 모든 다양한 형상을 자아로 파악하는 귀절이 있다. ‘유일의 지배자인 만물 내재의 자아는 단 하나의 자기의 형상을 다양상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자아는 유일하지만 동시에 다양한 모든 형상으로 영원한 자이다.

③ 무형상유한의 자아
󰡔카우시타키 우빠니샤드󰡕는 생기(生氣)를 궁극적인 자아로서의 예지아(叡智我)로 보고 있다. ‘이 생기는 지혜의 자아로서 터럭이나 손톱 끝까지 이 육체를 채우고 있다.’ 여기서 생기는 볼 수 없으므로 무형상이나 양적인 것으로 육체에 한정되어 있다. 이것은 불사(不死)의 자아로서 선행으로 훌륭해지는 일도 없고 악행으로 영락하는 일도 없는 만물의 지배자이다.

④ 무형상무한의 자아
󰡔브리핫드아란냐까 우빠니샤드󰡕에서는 허공에 대한 자아의 비유가 있다. ‘허공 속에서 살면서 허공보다 더 깊숙한 것, 허공은 이것을 모르고 오히려 그 형태가 되어 있는 것, 그리고 허공을 안에서 제어하는 것, 이와 같은 것이 스승님의 자아요, 내재자요, 불사자이다.’ 여기서는 자아가 무한한 허공보다 더 깊은 존재로서 허공을 안에서 제어하는 불사자(不死者)로 묘사되고 있다.

B.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로서의 자아

자이나교에서 영혼[자아]는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동물 속에 존재하며, 개인적인 영혼들이 구별되어 있고 완전한 상태에서조차 분리되어 있는 실체적 다원론을 표방한다. 그들에게 무수한 서로 다른 자아는 제한된 크기이지만 영원한 모든 종류의 실체의 거주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는 그의 참된 본질은 절대적 지식을 지닌 전지자이다. 그러나 전자자의 상태에서조차 분리되어 개체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비생명적인 아지바에 의해서 제한되어 표현된다. 까르마는 아지바의 하나로 미세한 물질로서 자아 속에 유입된다.
나형외도였던 아쩰라 깟싸빠(Acela Kassapa)는 유행자로서 위와 같은 자이나교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타인과 구별되는 자아, 자기와 구별되는 타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는 동시대적 인과론을 자타와 관련시켜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질문하고 있고, 붓다는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고 타자가 만드는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타자라는 개념 속에는 사양현대철학에 말하는 ‘너’와 ‘그것’이 모두 포함된다. 내가 괴로운 것이 사주팔자나 운명 때문이라면, 타자의 개념은 ‘나-그것 관계’ 속의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고, 내가 괴로운 것이 ‘너’ 때문이라면, 타자의 개념에는 ‘나-너 관계’속의 ‘너’가 포함된다.        

C. 정신ㆍ신체의 한 부분과 동일시되는 자아

정신ㆍ신체적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나 일부를 자아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경전에 반영된 자아관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자아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초기불교의 가르침에서는 부정되는 가르침이다. 자아라는 것은 정신ㆍ신체적 다발인 존재의 다발의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pañcakkhandha)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의 근현대 철학이나 심리학에서는 널리 경험적 자아의 개념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아라는 관념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라는 갈애에 의해서 생겨나 ‘나’라고 하는 망상에 의해서 ‘나의 자아’라는 견해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제임스라는 서양의 심리학자는 실제로 자아를 ‘나의 것’이라는 소유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본 것은 이러한 정황을 말하는 것이다.  

① 물질의 다발(色蘊)과 물질적 자아
물질의 다발은 물질의 불가분리의 집합을 말하는데 전통적으로 네 가지 위대한 요소, 곧 땅, 물, 불, 바람과 그 파생물질을 말한다. 파생물질이라는 말에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물질적 감각능력과 거기에 대응하는 외부적 대상인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이 포함되어 있다. 이 유도물질에는 내적, 외적인 모든 감각영역이 포함된다.
이러한 물질의 다발을 두고 자아와 관련하여 경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물질의 다발을 자아로 여긴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된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N. III. 2) 이러한 자아를 두고 우리는 신체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환원적 자아개념 가운데 자아를 신체적 감각의 담지자로 이해하는 감각적 자아의 개념과 유사하다.      

② 느낌의 다발(受蘊)과 정서적 자아
느낌의 다발은 느낌의 집합으로 물질적 정신적인 감각기관이 외부의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경험되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과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을 포함한다. 이 느낌에는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기관에 따라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시각접촉에 의한 느낌, 청각접촉에 의한 느낌, 후각접촉에 의한 느낌, 미각접촉에 의한 느낌, 촉각접촉에 의한 느낌, 정신접촉에 의한 느낌의 여섯 가지가 있다. 우리의 모든 정신ㆍ신체적인 느낌은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이러한 느낌의 다발을 두고 자아와 관련하여 경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느낌의 다발을 자아로 여긴다. 느낌을 자아로 여기거나,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거나,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된다. 그는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느낌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느낌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N. III. 2)  

이러한 자아를 두고 우리는 정서적 자아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환원적 자아개념 가운데 정서적 자아의 개념과 유사하다.

③ 지각의 다발(想蘊)과 인지적 자아
이것은 지각의 집합을 뜻하며 지각은 개념적인 파악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여기에 책상이 있다면 그것을 책상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지각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명칭 지어진 형상에 대한 지각, 소리에 대한 지각, 냄새에 대한 지각, 맛에 대한 지각, 감촉에 대한 지각, 사물에 대한 지각의 여섯 가지가 있다. 느낌과 마찬가지로 지각도 외부세계와 여섯 감관의 접촉을 통해서 일어난다.
이러한 지각의 다발을 두고 자아와 관련하여 경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지각의 다발을 자아로 여긴다. 지각을 자아로 여기거나,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거나,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된다. 그는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N. III. 3)

이러한 자아를 두고 우리는 인지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서양의 환원적 자아개념 가운데 자아를 표상의 담지자로 여기는 인지적 자아의 개념과 유사하다.  

④ 형성의 다발(行蘊)과 의지적 자아
형성의 다발은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형성의 집합을 뜻한다. 여기에는 선악과 같은 의도적 행위가 개입한다. 일반적으로 업(업:kamma)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생겨난다. 업에 관해서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의도이다. 의도가 있으면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으로 행하게 된다.’ 의도란 기본적으로 정신적 구성이며 정신적 형성이다. 이것은 마음을 선이나 악 또는 선악도 아닌 것으로 향하게 한다. 형성에는 외적인 대상의 지향에 따라 명칭 지어진 형상에 대한 의도, 소리에 대한 의도, 냄새에 대한 의도, 맛에 대한 의도, 감촉에 대한 의도, 사물에 대한 의도의 여섯 가지가 있다. 감수와 지각은 의도적 형성이 아니다. 그것들은 업보를 낳지 않는다. 믿음, 숙고, 의욕, 해석, 집중, 지혜, 정진, 탐욕, 성냄, 무명, 교만, 실체에 집착하는 견해 등은 업보를 낳는 의도적인 형성들이다. 이렇게 형성의 다발을 구성하는 52가지의 의도적 형성들이 있다.
이러한 형성의 다발을 두고 자아와 관련하여 경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형성의 다발을 자아로 여긴다. 형성을 자아로 여기거나,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기거나,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된다. 그는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N. III. 3)
이러한 자아를 두고 우리는 의지적 자아, 또는 형성적 자아라고 부를 수 있다. 이것은 19세기 서양의 환원적 자아개념 가운데 의지를 심리적 중심에 두는 의지적 자아의 개념과 유사하다.

⑤ 의식의 다발(識薀)과 의식적 자아
의식의 다발은 의식의 집합을 뜻하는데 의식이란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이에 대응하는 외부의 대상이나 현상의 반응이다. 예를 들어 시각의식(眼識)은 시각을 근거로 하고 형태를 대상으로 하여 보는 작용이다. 정신의식(意識)은 정신을 근거로 하여 관념이나 생각을 포함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인식하는 작용이다. 그래서 이 정신의식은 다른 감관과 연결되어 있다. 감수, 지각, 형성과 같이 의식에도 시각접촉에 의한 의식, 청각접촉에 의한 의식, 후각접촉에 의한 의식, 미각접촉에 의한 의식, 촉각접촉에 의한 의식, 정신접촉에 의한 의식의 여섯 가지가 있다. 의식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일종의 알아차림이다. 대상의 존재를 단지 알아채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눈이 파란 색의 물체를 보았을 때에, 안식은 빛깔의 존재를 알아챌 뿐이고, 그것이 파란 색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 단계에서는 아무런 인식이 없다. 그것이 파란 색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는, 지각(想)의 단계이다. 시각의식이라는 말은 곧 ‘본다’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다. 다른 형태의 의식들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의식의 다발을 두고 자아와 관련하여 경전은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세상에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의식의 다발을 자아로 여긴다. 의식을 자아로 여기거나,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거나,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된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진다.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N. III. 3)

이것은 일반적으로 서양관념철학에서 자아를 의식으로 사유하는 자와 동일시하는 것과 같다.      

2) 서양철학의 자아개념

서양고대철학과 중세철학에서는 자아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혼이나 육체나 자아관이나 의식에서 간접적으로만 밝혀진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성은 대상처럼 사유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은 사유된 것의 도움으로 자신을 사유한다. 그는 자신을 사유하거나 다른 것을 사유하는데 자신을 사유하는 것은 매개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혼이 불어넣어진 사람인 영혼은 자신을 자각하는 것이 최상의 과제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의 자기반성인 자아의식으로부터 영혼과 육체를 구별했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처럼 니콜라우스 폰 퀴에스에 따르면, 영혼은 오로지 그 작용에 의해서만 관찰되지 스스로 관찰되지 않는다. 즉 ‘인간은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앎으로서 그가 이것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더라도 그 안에 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  
데카르트에 와서 자아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생겨났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는 모든 우리를 둘러싼 것을 제거하더라도 그것은 진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유하는 존재이다. 로크는 자아는 의식으로써 사유하는 자라고 했다. 새로운 시대의 특징적 형이상학은 <<나는 생각한다>>라는 것 속에서 주관을 존재하는 실체로 파악했다. 라이프니쯔에 의하면,  이성적인 영혼이 다른 존재자와의 차이점은 나, 실체, 영혼, 정신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는 자아성찰의 능력이다. 자아에 대한 이러한 지식으로부터 우리는 실체의 개념을 열어서 의식으로써 사유하고, 의지하고 행위하는 그러한 것으로 신의 창조적 작업에 참여하고 우리의 행위에 도덕적으로 책임을 진다. 버클리도 자아를 지각하고 사유하는 영혼이나 정신적 실체와 일치시켰다. 그러나 데카르트, 라이프니쯔, 버클리와는 달리 흄에게는 영혼이나 자아는 체험적인 대상이 아니라서 실체나 존재가 아니다. 그에게 지각이나 개념이나 느낌은 단지 연합된 표상의 내용일 뿐이고 그 대상은 지각되고 사유될 뿐이다. 그는 그 근저에 놓인 자아에 대해서는 어떠한 연관된 진술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칸트는 경험적 자아와 초월적 자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모든 계승적 철학을 비판한다. 전비판의 시대에는 설명적이 아니라 직관적인 자아인식에 감각과 지성, 현상과 본질, 관찰과 사유 사이에 이원론이었는데, 그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 관념론을 버렸다. 그에게 자아는 경험적 자아로서 내적 감성의 대상이고 또한 외적 감성의 대상처럼 현상이다. 그리고 초월적 자아, 순수 자아, 사유하는 주관으로서의 자아는 단지 형식적이고 초월적인 인식과 대상을 구성하는 의식의 통일성, 사유의 근거이자 최상의 원리인 통각이다. 따라서 사유의 주관으로서의 자아는 순수한 통각, 순수한 반성적 자아이고,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자아는 내적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내적 감성에 따른 지각의 대상이다. 그에 비해서 피히테에게서 자아는 스스로 정립하는 대로 존재하고, 존재하는 대로 자신을 정립한다. 그러므로 자아는 대자적이다. 대자적이 아닌 것은 자아가 아니다. 자아의식이 있기 전에는 ‘자아’는 자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아와 비아는 교환적으로 자신을 제한한다. 하나의 실제는 다른 실제를 지양한다. 헤겔에서 자아의식은 모든 다른 것을 자신에게서 제외시킴으로서 자기 자신과 동일한 대자적인 존재이다. 그의 본질과 절대적 대상은 그에게 자아이다. 쇼펜하우어는 자아에 관하여 의지적 자아와 인식적 자아의 동일성을 하나의 기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아를 단순하고 불리될 수 없는 파괴될 수 없는 실체로 본 것이 아니라 두 이종적인 구성물, 파괴될 수 없는 형이상학적인 의지와 파괴될 수 있는 형이하학적인 인식으로 이루어졌다. 그에게 인식은 두뇌의 작용에 불과하다. 니체는 이것을 계승하여 자아를 의지적 측면에서 이해하여 세계를 자아에 의해서 의지(意志)된 것으로 파악했다. 후셀은 그의 현상학에서 자아와 세계를 서로 반립시켰다. 우연적인 세계라는 명제는 순수자아와 필연적인 자아생활의 명제에 대립해 있다. 모든 체험은 깨어있는 자아 -그것이 체험류안에서 꼬기토(cogito)의 특수한 형태 안에서 지속적으로 의식을 수행할 때-라고 불리는 순수자아와 관계된다. 지각하는 것 속에서 지각된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속에서 인식된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환상하는 것 속에서 환상된 것을 지향하는 것으로, ‘나’를 순수하게 취하는 한, 나는 ‘나’를 순수자아로 취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의 통로가 자아에 대한 반성을 통해 어떻게 열리는가라고 묻는다. ‘내가 말한다’는 것이 세계내 존재로서의 현존재가 말하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본질적이고 최종적인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에 대한 이해, 걱정(Sorge)에서부터 온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것은 나에게 사유보다 더한 것, 즉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아존재의 완전한 개시 속에서 동시에 모든 존재가 드러난다. 모든 존재의 완전한 현존성속에서 자아존재가 가능한 한 정점에 달한다. 대상에의 침잠과 자아에의 침잠은 하나 속에서 일어난다. 세계의 경계는 자아의 경계이다. 그러므로 의사소통의 방식에 따라 자아개념은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다. 현존재로서의 자아는 살아있는 자의 맹목적인 의지를 가지고 산만하고 항상 바뀌고 변화하는 현재의 ‘이것’을 말하고, 의식으로서의 자아는 ‘나는 생각한다.’는 것으로,  ‘내’가 현존재로서 그 앞에서 동시에 사라지기 전의 가치를 말한다. 정신으로서의 자아는 하나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전체 가운데 있는 관념의 장소이다. 실존으로서의 자아는 경험적 자아를 삼키는 조건으로 실현되는 자아존재이다. 이성으로서의 자아는 인간존재가 존재 안에서 기초지어진 전체가 되고 싶은 의지이다. 싸르트르에게서 자아의식이 존재성에 이르지 못한다. 자아는 전의식의 존재자로서 주어지고 의식에게 초월적인 즉자로서 나타난다. 자아는 의식의 거주자가 아니고 의식의 ‘대상적 나’(moi)이지 그 본질이 아니다.
2. 무아의 스펙트럼

1) 무아사상의 토대

동양이나 서양이나 기본적으로 자아개념을 나, 실체, 영혼, 정신의 개념과 동일시하는 성향이 있었다. 따라서 자아의 부정은 실체나 영혼의 부정과 직결된다. 무아사상의 토대에는 바로 이러한 실체관념을 부정하는 모든 현상의 조건적 발생, 즉 연기(緣起:paṭiccasamuppada)의 원리가 놓여있다. 초기경전에 등장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연기에 관한 정의는 원시불교에서뿐만 아니라 아비달마불교나 대승불교에서도 그 근본이 되는 연기사상에 대한 정의로 인구에 회자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다음과 같은 귀절로 이루어져 있다.

① 이것이 있을 때 이것이 있다.
② 이것이 생겨나므로 이것이 생겨난다.
③ 이것이 없을 때 이것이 없다.
④ 이것이 소멸하므로 이것이 소멸한다.

여기서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이것’이라고 하는 것은 실체적이며 자기동일적인 ‘이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구체적인 수레를 ‘이것’이라고 할 때 초기불교의 경전상에서는 수레의 단일한 실체성이 부정되고 관계성 속에서 존재하듯이 ‘이것’이라는 것은 자기동일성을 지닌 단일한 어떤 불변의 실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계성을 지닌 사건으로서의 인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이것’을 시사(是事)로 번역하고 있는 곳이 발견된다.

이러한 사건이 있으므로 이러한 사건이 있다. 이러한 사건이 생겨남으로 이러한 사건이 생겨난다.

이러한 구나발다라(求那跋陀羅)의 해석은 ‘이것’이 어떤 실체라기보다는 사태나 사건임을 통찰한 예리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의 모든 사실은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작은 시공적 한계를 차지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사건들은 물체가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처럼 불투과적인 것이 아니다. 반대로 시공적 모든 사건은 다른 사건들에 의해서 겹쳐진다.
위의 연기론은 모든 현상이나 사실의 상호 의존성과 조건적 발생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현상이나 사실은 사건의 특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건은 무상한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초기경전은 이러한 사실이나 사건을 두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은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etaṁ mama esohamasmi eso me attā ti)’라고 애착하고 탐착하고 집착한다고 주장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자아는 갈애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자의식이고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견해에 불과한 것이다. 붓다고싸(Srp. II. 98)에 따르면, ‘이것은 나의 것이고’는 갈애에 대한 집착(taṇhāgāha)이고, ‘이것은 나이며’는 자만에 대한 집착(mānagāha)이고,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는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igāha)이다. 사건은 무수한 사건과 관련되어 인과적으로 연기되기 때문에 어느 한 사건을 때어내어 ‘나의 것’나 ‘나’ ‘나의 자아’라고 주장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무의미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자아는 불쾌를 버리고 쾌를 추구하는 갈애가 만들어내는 환상에 불과하다.      

2) 무아의 스펙트럼

위와 같은 연기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있는 무아사상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관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① 만약 자아가 『브리하드아란니야까 우빠니샤드(Bṛhadāraṇyaka Upaṇiṣad)』에서처럼 자아는 알려질 수 없는 것, 즉 초감각적이고 초월적 주관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초감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은 의식의 세계에서 빠져나간다.
② 만약 자아가 『찬도기야 우빠니샤드(Chāndogya Upaṇisad)』의 자아는 알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각 가능한 것, 즉 경험적인 인식주관이라면, 그것은 자아가 아니고 존재의 다발[五蘊]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객은 없어지고 존재의 다발만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아사상에 비추어보면,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와 암암리에 그것을 가정하는 타자와 구별되는 자기로서의 자아는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분명히 초기불교의 관점은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의 결합체로서 자아를 부정하지 않지만, 자아를 존재의 다발과 일치시키는 어떠한 시도도 부정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아적이다.  
A.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
B. 타아과 구별되는 자아로서의 자아의 부정
C.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의 무아적 자아

A.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자아의 부정

부처님은 『대연경(大緣經:Mahānidānasutta)』을 통해서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영혼 또는 자아를 부정한다.

“아난다여, 자아를 시설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시설하지 않는가? 아난다여, 자아를 형상을 지니고 유한한 것으로 시설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형상을 지니고 유한하다’고 시설하지 않는다. 또한 아난다여, 자아를 형상을 지니나 무한한 것으로 시설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형상을 지니나 무한하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또한 아난다여, 자아를 무형상이나 유한한 것이라고 시설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무형상이나 유한하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또한 아난다여, 자아를 무형상이고 무한한 것으로 시설하지 않는 자는 ‘나의 자아는 무형상이고 무한하다’라고 시설하지 않는다.”

불교가 영원한 정신적 실체를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의 물질적 특성을 표현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올덴베르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교가 영혼의 존재를 부인했다면 그러한 사고방식 속에서 어떤 물질적인 특성을 표현하려는 의미라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의미에서 불교는 육체의 존재를 부인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와 영혼은 자신 속에 폐쇄되고 스스로를 고수하는 실체가 아니라 오직 다양하게 엮어진 생성과 소멸의 과정의 복합체로서 존재한다.

초기경전은 다만 정신 또는 육체적 현상의 조건성을 강조한다.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실체, 고정불변의 자아에 관해 혼란될 필요가 없다. 이러한 원리는 러셀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맥락을 같이한다.

예전에 당신들은 영혼은 실체이고 모든 실체는 파괴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변화하지만 영원한 본질이라는 의미에서의 실체라는 관념은 세상에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다.

영혼뿐만 아니라 사물들도 물질적인 실체의 덩어리가 아니라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五蘊)이 서로 복합적으로 연관되어 있어 의존하면서 상호작용하는 사건의 체계이다. 󰡔중부니까야󰡕는 그러한 의미의 사물의 특성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고 있다.

“벗이여, 마치 목재를 조건으로, 덩굴을 조건으로, 볏짚을 조건으로, 진흙을 조건으로, 공간이 둘러싸여 집이란 명칭을 얻게 되는 것처럼 벗이여, 뼈를 조건으로, 근육을 조건으로, 살을 조건으로, 피부를 조건으로, 공간이 둘러싸여 신체란 명칭을 얻게 된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조건들은 단순히 질료적 상태라면 원인이 될 수 없는 것이지만 사물은 단지 질료적 상태가 아니라 다양한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사건의 체계이므로 조건적으로 생성되는 다른 사건이란 결과를 갖는다. 그러나 그 결과로서 획득되는 것은 명칭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결과란 상호작용하는 전체의 과정에서 부분을 분리하는 원인조작에 의해 사실을 괴롭힌 결과 생겨나는 통제된 허구이기 때문이다. 야스이 고사이(安井廣濟)는 위의 경문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목재, 풀, 볏짚, 진흙 등의 실재적 모든 요소는 가옥이라는 우리들의 주관관념을 일으키는 객관적인 원인이자 근거이며 뼈, 근육, 살, 피부 등의 실재적 모든 요소는 신체라는 우리들의 주관관념을 일으키는 객관적 원인이자 근거로서 이러한 객관적인 원인․근거에 의해서 가옥과 신체 등에 관한 우리들의 주관적 관념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연기설이다.

그는 ‘명칭을 얻게 된다(saṅkhaṁ gacchati)’를 ‘관념의 발생’으로 이해해서 주관적 관념은 객관적 원인에 의해 발생하므로 관념은 스스로 독립자존하지 않는 것이므로 따라서 무상(無常), 무아(無我)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는데, 이러한 설명은 객관적 원인은 독립자존하는 실체라는 여운을 남기는 데에서 불충분한 것이지만 존재론적인 인과법칙 자체 내에 내재되어 있는 객관―주관의 인식론적인 연기를 배제하지 않는 입장에서 일체 존재를 주관적인 상대적 존재로 파악할 수 있는 측면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사실을 주관적 측면에서 인위적으로 개념화하여 조작한 결과 나타나는 허구적 측면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허구는 사실을 개념화한 통제된 허구라는 측면에서 방편적으로 연기론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필요조건이 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도 이미 일체 존재는 단적으로 허구(sabbaṁ vitathaṁ idaṁ)에 불과하다는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물질(色)이라는 것은 포말(泡沫)과 같고, 감수(受)는 수포(水泡)와 같고, 지각(想)은 신기루와 같고, 형성(行)은 파초와 같으며, 의식(識)은 환상과 같다고 태양의 후예(붓다)는 말했다.

이 허구라고 하는 뜻에는 관념이나 사유에 의해 조작된 존재로서 실체가 없다는 의미는 있으나 허구 자체가 연기적으로 통제된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체 존재는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며 사유의 조작이며 연생(緣生)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물의 존재론적 무실체성이 공(空:suñña)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초기불교에서는 절대적 실체로 여겨질 수 있는 주체관념을 모두 부정한다. 즉, 행위주체나 인식주체를 모두 부정한다. 소펜하우어는 행위주체와 인식주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자아의 기적이라고 보았으나 불교에서는 그 두 가지 주체가 모두 부정된다.  
몰리야 팍구나(Moliya Phagguna)는 일체의 행위에 관해 주체자가 있는가 하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던지고 있고, 붓다는 그 질문의 잘못됨을 지적하면서 주체가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여주고 있다.

“세존이시여, 누가 취착합니까?”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와 같은 질문은 옳지 않다. 나는 ‘누가 취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누가 취착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취착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처럼 말하지 않았으므로 ‘세존이시여, 무엇을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납니까?’라고 묻는다면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해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며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라고 답변하는 것이 옳다.”

경전에서는 ‘취착하는 자’뿐만 아니라 ‘갈애하는 자’ 또는 ‘모든 존재의 다발이란 자양분을 섭취하는 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전개된다. 12연기에서 자양분이란 형성(行)의 질료적 속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자양분의 섭취자란 형성적인 행위자를 의미하며, 여기에 의식이란 질료가 포함되듯이 인식행위의 주체자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전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러한 행위의 주체를 상정하는 질문이 연기의 법칙 속의 조건에 관한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행위의 주체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정은 결국 원인에 대한 탐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행위의 주체가 존재한다면 그 주체는 인과의 존재상의 계기에서의 원인의 우선성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에 행위의 주체가 실체로서 존재한다면 그 주체는 불변성을 요청하게 되고 엄밀한 의미에서 연기의 존재상의 계기에서 그 계기성을 박탈하는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게 된다. 연기가 진리라면 본질적으로 조건적이고 필연적인 산출적 관계 속에 있는 다르마 속에서 그 배후에 숨어 있는 무조건적이고 초자연적인 영원한 행위의 주체를 찾아내려는 것은 모순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주먹을 휘둘러 유리창을 깼다’는 사건은 ‘나의 주먹 휘두룸’이란 사건이 ‘유리창 깨짐’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하지만 좀더 ‘나의 주먹 휘두룸’을 분석해본다면 실제로는 ‘어떤 의도에 의해 신체적으로 야기된 주먹 휘두룸’에 불과하다. 뿔리간드라는 이러한 행위주체의 상정이 가져오는 불합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윤리학과 존재론 사이의 비양립성이 있는 듯하다. 거의 모든 철학과 종교들이 한편으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구적인 영혼, 혹은 자아를 갖고 있다고 가르치면서 다른 편으로는 자비와 관용, 무엇보다도 비이기성을 권고한다. 그러나 그가 영원한 자아나 영혼을 갖고 있다고 믿는 한 비이기적이 된다는 것은 어려울 뿐 아니라 부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 하는 존재론적 견해와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 가르침 사이의 갈등이 회의와 긴장, 죄악감과 불안의 삶으로 이끄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럽지 않다. 붓다는 존재론의 윤리에 대한 관련을 명백히 보았을 뿐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발달에 가장 도움이 되는 존재론을 가르쳤다는 점에서 인류의 스승들 가운데서도 독특하다. 그래서 붓다의 윤리는 그의 무아설로부터 시작되며, 그것은 다시 존재론적으로 연기설에 굳게 바탕을 두고 있다. 붓다의 비범한 통찰은 도덕적 완성은 존재에 대한 인식(바른 견해)이 없이는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왜 바른 견해(正見)가 8정도의 처음에 오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붓다가 왜 지칠 줄 모르고 사람들에게 영구적인 자아라는 사악한 착각을 버리라고 훈계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착각의 파괴가 깨달음과 고통의 극복, 그리고 완성을 향한 첫걸음이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서도 인식의 주체도 부정된다. 인식이란 불교에서 볼 때 행위와 밀접하게 수반되는 것으로 자양분이라는 형성(行)의 질료적인 속성에서 볼 때에는 행위의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 지각 과정인 접촉(觸:phassa)이란 자양분의 섭취는 비유적인 것이지만 ‘접촉하는 자’는 있는가 하는 행위의 주체자에 대한 질문을 야기시키는데, 실제로 앞과 동일한 경전에 몰리야 팍구나와 붓다 사이에 동일한 문답을 주고받는다. 여기서도 인식의 주체를 상정하는 질문은 그러한 인식에 대한 조건에 관한 질문으로 대체되며 인식하는 자라는 인식의 주체는 행위주체와 동일하게 부정된다.
󰡔중부니까야󰡕에는 인식과정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그러한 인식의 조건적 발생에 관해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벗이여,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이 세 가지의 만남이 접촉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며, 감수하는 것을 지각하며, 지각한 것을 추론하며, 추론한 것을 희론하며, 희론한 것을 인연으로 과거, 미래, 현재에서 형상이 눈을 통해 인식되어야 할 때에 인간에게 희론에 의한 개념적 판단이 행해진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연기법의 비인칭적 문안으로 시작하다가 중간에 ‘감수한 것을 지각하며(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라고 삼인칭 단수의 문구로 나가는 것은 깔루빠하나가 지적했듯이 인식주체의 활동을 암시하는 것이긴 하지만, 여기에 자아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단순히 존재상의 계기로서 인식활동의 모든 계기에 의식이 수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문법적으로도 yaṁ vedeti taṁ sañjānāti를 반드시 능동적인 동인을 갖는 인식주체의 활동을 서술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희론한 것을 인연으로 인간에게 희론에 의한 개념적 판단이 일어난다(yaṁ papañceti tatonidānaṁ purisaṁ papañcasaññāsaṅkhā samudācaranti)’는 최종적인 문구와 관련된 것이 삼인칭 단수의 모든 관계문장은 yam papañceti처럼 tatonidānam으로 이끌어지며 연기의 존재상의 계기를 나타내는 주문장과 최종적으로 관계되는 만큼 희론에 의한 개념적 판단(papañcasaññā saṅkhā)이 조건적으로 발생한다는 비인칭적 결과를 유도하므로 인식의 주체라는 존재 문제를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B. 타아와 구별되는 자아의 부정

타아과 구별되는 자아란 개념은 암암리에 형이상학적인 실체로서의 자아를 가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동일성, 또는 의식의 통일성이란 문제를 전제로 한다. 스트로우슨은 ‘특수한 의식의 통일성, 자기 동일성의 원리의 문제’에 관해 ‘만약에 그러한 원리가 있다면 우리 각자가 자신의 동시대적 체험이 그 자신의 것이냐 다른 사람의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그것을 적용시켜야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무의미하다.’라고 일축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기동일성을 정신ㆍ신체적 복합체인 존재의 다발들(五蘊)을 결합시키는 신비적인 종류의 형이상학적인 고무줄로 판단하는 것도 초기불교의 기본 구조에 대한 오해에 의존한다. 존재의 다발 자체가 자아는 아니지만, 존재의 다발들을 떠나서 따로 자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앞에서 인용한 아젤라 깟싸빠와 부처님의 대화를 다시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동시대적 인과론을 자타와 관련시켜 네 가지 범주로 나누어 질문하고 있고, 붓다는 그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타자가 만든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고따마여, 괴로움은 자기가 만들고 타자가 만드는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따마여, 괴로움은 스스로 만든 것도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난 것입니까?’ ‘깟싸빠여, 그렇게 말하지 마라’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에 나타난 네 가지의 자타중도적 인과론은 ≪쌍윳따니까야≫에서는 괴로움뿐만 아니라 즐거움의 원인에 관해서도, ≪디가니까야≫의 「청정경(Pāsādikasutta)」에서는 자아(atta)와 세계(loka)의 원인에 관해서도 동일하게 표현하므로 다음과 같은 일반적 분류를 이끌어낼 수 있다.
① 자아원인설:자기 자신이 만든 것이다(自作:sayaṁkataṁ).
② 타자원인설:타자가 만든 것이다(他作:paraṁkataṁ).
③ 자타원인설:자신이 만들고 타자가 만든 것이다(自作他作:sayaṁ katañca paraṁ katañca).
④ 비자비타원인설:자신이 만든 것도 타자가 만든 것도 아니다(非自作非他作:asayaṁkāraṁ aparaṁkāraṁ=偶然論:adhiccasamuppannaṁ).
이것들은 원래 느낌 뿐만 아니라 세계와 관련하여도 실체로서의 자아나 타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되어야하는 논리들이다.  

C.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의 무아적 자아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의 자아는 의미상으로 경험적 자신이나 경험적 개인을 뜻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자아는 존재하지만, 그것은 이미 ①과 ②의 고정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나 어떤 정신ㆍ신체적 요소와 일치하는 자기동일적인 자아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 변화하는 경험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이 경험적 자아란 것은 사실상 자아가 아니고 정신ㆍ신체적 다발인 존재의 다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 이 자아는 무아적인 것이다.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pañcakkhandha)은 각각 모두 자아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초기경전에서는 존재에 다발에 대하여 이와 같이 무아적 사유를 촉구한다.

① 물질의 다발(色蘊)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② 느낌의 다발(受蘊)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느낌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③ 지각의 다발(想蘊)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지각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지각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지각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지각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지각이고 지각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지각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지각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④ 형성의 다발(行蘊)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고귀한 님을 보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고,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형성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형성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형성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형성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형성이고 형성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형성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형성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⑤ 의식의 다발(識薀)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의식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의식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의식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의식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의식이고 의식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의식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의식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존재의 다발의 각각의 요소가 자아와 동일시될 수 없지만, 존재의 다발의 복합체로서 변화하는 존재는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수레가 수레의 부품으로 구성되었으나, 수레의 부품이 그 수레가 아니고, 그 부품의 쌓임이 수레가 아니지만, 부품이 작용적으로 결합된 복합체를 수레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아는 존재의 다발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즉 무아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그 무아적 자아란 세계의 발생과 소멸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우리 자신의 지각하고 의식하는 몸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붓다]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속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과 세계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있다는 것을 나는 시설한다.”

이 말은 곧 깨달음도 정신ㆍ신체적인 존재의 다발인 우리 자신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뜻한다. 그리고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이 세계인 이유는 어떤 정신ㆍ신체적 사건은 다른 무수한 사건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세계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의 의미에서 우리 자신, 너 자신이라는 말은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을 뜻하고 그것은 곧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을 의미하므로 무아적인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것을 필자는 무아에 비추어진 자아 또는 무아적 자아라고 표현한다. 그 속에서 세계의 소멸인 깨달음도 발견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속의 ‘그대 자신을 그대의 섬으로 하고 그 대 자신을 그대의 피난처로 하지 다른 누구도 그대의 피난처로 하지 말라.’는 경구가 있다. 이 경구를 불교에서 영원한 자아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은 ‘자아를 등불로 하고 자아를 피난처로 삼으라.’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이러한 말씀하게 된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서 말한 자신이나 자아라는 것은 감추어진 영원한 자아나 형이상학적인 불변의 자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여래’에게는 감추어진 사권이 없다는 것과 ‘내’가 승단을 이끌어간다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전제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난다여,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난다여, 나는 안팎의 차별을 두지 않고 가르침을 다 설했다.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 감추어진 사권(師拳)은 없다.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수행승의 승단에 관하여 어떠한 공표를 해야 할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여래는 이와 같이 ‘내가 수행승의 승단을 이끌어 간다.’라든가, ‘수행승의 승단이 나에게 지시를 받는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여래가 수행승의 승단과 관련하여 어떤 공표를 하겠는가? … 그러므로 아난다여,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고, 가르침을 섬으로 삼고 가르침을 피난처로 삼지 다른 것을 피난처로 삼지 말라.”  

붓다가 아난다에게 전하려고 했던 가르침은 아주 명백하다. 너 자신을 섬으로 하라는 것은 감추어진 형이상학적인 자아나 아트만을 섬으로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일상적 의미의 자신이라는 말로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을 뜻하고 그것은 곧 무아적으로 연기되는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까무라 하지메와 같은 학자는 위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에서 아트만을 부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그가 자신을 합리화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율장의 이야기였다. 붓다는 베나레스 근처의 우루벨라로 가는 길목 숲 속 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어느 날 젊은 왕자 30여명이 젊은 아내들을 데리고 그 숲 속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 중에 결혼하지 않은 한 왕자는 창녀를 데리고 왔다.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동안 그녀는 귀중품을 훔쳐서 달아났다. 그들은 숲 속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다 나무 밑에 앉아 있는 붓다를 보고는 그 여인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붓다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들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을 때에 붓다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붓다] “젊은이들이여,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느 것이 그대들에게 이로운 것인가? 여자를 찾는 것인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인가?”

나까무라 하지메는 이 대화가 형이상학적 자아 또는 아트만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초기불교의 자아가 챤도갸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이 범천의 도읍지안에 있는 작은 연꽃을 한 주거지의 그 내부에 조그마한 빈터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아트만,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Chand-Upan. viii.3)라는 우파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자아를 계승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이미 논의했듯이 부처님은 명백히 형이상학적 자아에 대해 부정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우파니샤드적인 진아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의미의 자아, 즉 ‘지각과 더불어 의식이 있는 이 육척단신의 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는 무아적 자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러한 설법 다음에 부처님은 결코 아트만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으며, 단지 다르마에 대한 통찰이나 네 가지 새김의 토대[四念處]와 같은 위빠싸나 수행을 강조한 것을 볼 때에 무아적으로 연기되는 정신ㆍ신체적 존재의 다발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성찰이라는 측면에서의 자아를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III. 무아적 자아의 윤회

윤회의 문제는 이 논문에서 중심주제가 아니므로 간략하게 다룬다.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 가변적인 무실체적 자아, 즉 무아적 자아는 어떻게 윤회하는 것일까? 변화하지 않는 영혼이나 의식이 없이 어떻게 개체의 자기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윤회가 성립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죽어서 정신ㆍ신체적 구성요소들이 모두 변한다면, 어떻게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처님은 ≪앙굿따라니까야≫에서 분명히 자신의 윤회와 제자들의 윤회에 관하여 명확히 언급했다:‘수행승들이여, 고귀한 계율, 고귀한 삼매, 고귀한 지혜, 고귀한 해탈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고 꿰뚫지 못해서 이와 같이 나뿐만 아니라 그대들은 오랜 세월 유전하고 윤회하였다.’  
무아적 자아가 윤회할 때에 행해진 신체적ㆍ언어적ㆍ정신적 행위[業]의 다발에 의해서 윤회한다. 행위가 존재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어서 다시 태어나 모든 상황이 변하더라도 업력이 승계되는 것은 마치 한 회사가 다른 회사로 바뀌는 것의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한 회사가 다른 회사로 이름을 바꾸고 구조조정을 통해서 사장이나 고용인들이 바뀌거나 감원되거나 증원되고 심지어 생산품이 바뀌더라도, 이를테면 그 회사의 활동사항인 채무관계는 회사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끼치며 그대로 승계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보다 적확한 비유는 부처님께서 경전에서 설명했듯이 재생은 존재의 다발의 모닥불의 불꽃이 다른 모닥불에 옮겨 붙는 것과 같다. 그 때의 연결고리란 단지 의식이나 행위만이 아니라 복합적인 존재의 다발들(五蘊) 자체이다. 올덴베르크는 볼꽃의 비유를 들어 비트겐슈타인적 섬유론을 좀더 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존재들은 불꽃에 비유된다. 그들의 현존과 그들의 재생은 무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연료 속에서 스스로 취착하고 스스로 침식하는 타오르는 불꽃이다. 불씨가 바람에 운반되어 먼 곳에 불을 다시 지피듯이 이처럼 불꽃에 비유되는 존재들은 재생의 순간에 오래된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으로 태어난다.
여기서 윤회의 연결고리로 비유되고 있는 불씨는 단일한 어떤 존재의 다발이 아니라 연료들을 포함한 복합적인 존재의 다발들의 사건 자체이다.  
존재의 다발로 구성된 우리의 가변적 자아가 이 생에서 죽어서 저 생에서 태어나면, 그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모든 구성요소[존재의 다발인 五蘊]가 바뀌더라도, 그 전생의 활동사항인 선악의 행위[業]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성숙하여 그 과보를 맺게 된다.
≪앙굿따라니까야≫에는 그러한 과정이 잘 설명되고 있다:

‘수행승들이여, 탐욕에서 출현하고, 탐욕에서 기원하고, 탐욕에서 연원하고, 탐욕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현세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더 먼 미래에서나 언제나 그 해당하는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그 행위가 성숙하며, 그 행위가 성숙한 곳에서 행위의 과보가 거두어지게 되며, 분노에서 출현하고, 분노에서 기원하고, 분노에서 연원하고, 분노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현세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더 먼 미래에서나 언제나 그 해당하는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그 행위가 성숙하며, 그 행위가 성숙한 곳에서 행위의 과보가 거두어지게 되며, 어리석음에서 출현하고, 어리석음에서 기원하고, 어리석음에서 연원하고, 어리석음에서 일어나는 행위가 있는데, 그러한 행위는 현세에서나 다음 생에서나 더 먼 미래에서나 언제나 그 해당하는 존재가 생겨나는 곳에서 그 행위가 성숙하며, 그 행위가 성숙한 곳에서 행위의 과보가 거두어지게 된다.’

이 때에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밭으로서의 행해진 행위[업]와 종자로서의 의식과 수분으로서의 갈애이다: ‘업은 밭이고 의식은 종자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붓다고싸에 따르면, 존재는 착하고 건전하거나 악하고 불건전한 업이 자라는 장소이기 때문에 밭이고, 그것과 동시에 생겨나는 유위적인 형성의 의식이 싹트는 장소이기 때문에 종자이고, 보살피고 자라게 하기 때문에 갈애는 수분이라고 한다. 이 때 무명의 장애와 갈애의 결박에 의해 하층세계의 의식이 확립되면, 미래에 감각적 쾌락의 욕망세계의 존재로 태어나고, 이 때 무명의 장애와 갈애의 결박에 의해 중층세계의 의식이 확립되면, 미래에 미세한 물질세계의 존재로 태어나고, 이 때 무명의 장애와 갈애의 결박에 의해 상층세계의 의식이 확립되면, 미래에 비물질세계의 존재로 태어난다. 그리고 그 행위가 그곳에서 성숙하게 된다.


IV. 결론
  
초기불교에서는 일부 강력한 유아론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물활론적이고 감추어진 신비적인 불변의 영원한 자아나 인식론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자아를 부정한다. 그리고 자아와 타아가 구별되는 자기동일성의 원리를 자아로 규정하는 것도 거부한다. 그리고 정신ㆍ신체적 어느 한 요소를 존재하지 않는 영원한 형이상학적 자아와 일치시키는 것도 거부한다.
그러나 일상적 의미에서의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로서 가변적 자아에 대해서는 긍정한다. 우리는 그것을 연기적 자아 또는 무아적 자아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서 자아라는 것은 그것이 지시하는 영원한 실체가 없는 단지 명칭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허구적인 것은 아니고 갈애를 토대로 만들어지고, 조건적으로 발생하는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라는 사실에 의해서 통제되는 가변적 자아라고 볼 수 있다. 자아가 정신ㆍ신체적 복합체라는 사실에 의해서 통제되는 측면을 자아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적 자아는 연기적 자아이고 무아적 자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하는 가변적 자아이다. 악행을 하면, 우리에게 자아는 사랑스럽지 않게 되고 선행을 하면, 우리에게 자아는 사랑스러운 것이 된다. 일상적 의미의 자아는 이와 같이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연기적 자아이고 불변적 실체가 없는 무아적 자아로서 신체적ㆍ정신적ㆍ언어적 행위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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