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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대승기신론의 자기이해
대승기신론의 자기이해


정영근 교수(서울산업대)


1. 머리말-두 개의 자기

불교는 우리들 인간이 자유스럽지 않은 상태에 있다(苦)고 하는 현실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괴로움은 자아관념이라는 잘못된 집착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파악한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과 번뇌는 자신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며,나 아닌것(非我)을 나(Atman)로 잘못 알고서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의 무아설은 ‘나’라든가 ‘내것’이라는 생각을 아집이라고 하여 철저히 배척하는 것이다. 5온(蘊)의 임시적인 결합이 있을 뿐 ‘나’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말한다. ‘나’의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는 영속적이고 단일한 존재로서의 자아라는 실체를 상정하거나 그것에 매달리는 것에 대하여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행위하는 윤리적 주체로서 자기의 존재까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붓다는 “자기는 자기의 주인이며,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라”고 가르쳤다. 유락(遊樂)에 빠져있는 청년에게는 “여자를 찾아다니지 말고 자기를 찾아라”고 권하기도 했다. 자기를 바르게 이해하고 참다운 자기가 되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불교는 두 가지 자기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일상적인 모습으로서 나 아닌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집착에 빠져 온갖 번뇌와 괴로움을 야기하고 있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잘못을 제대로 알고 자기를 제어하여 찾아야 할 이상적인 모습으로서의 자기라고 할 수 있다. 무명으로 시작하는 12연기의 순관은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해명한 것이고, 그 역관은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길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자기의 두 가지 다른 모습은 모두 자기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불교의 모든 교설은 마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법구경에 나오는 “마음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된다. 마음이 중심이 되고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는 말은 이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불교의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칠불통계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그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라고 설하고 있다. 이처럼 마음을 인생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으로 보고,마음의 정화를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불교다. 따라서 불교가 마음에 대한 탐구에 전력을 쏟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대승기신론은 미혹한 마음의 모습과 깨달은 마음의 모습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이 글은 대승기신론의 논의를 중심으로 하여, 불교가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을 어떻게 해명하고, 또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는 길을 어떻게 제시하는가를 밝혀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것이다.

2. 유식설과 여래장설의 자기이해

현실세계의 미혹한 자기의 모습을 가장 체계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것은 여러 불교사상 가운데 유식설이라고 할 수 있다. 유식불교는 유식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모든 것을 마음에 비추어서 나타난 표상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현실의 모습을 낳는 마음의 구조와 작용에 대하여 구조적으로 분석한다.
그리하여 제육의식(第六意識)의 밑바닥에 자기를 중심으로해서 모든 것을 헤아리는 자아의식을 발견했다. 이를 제칠말나식(末那識)이라고 하는데,항상 자기를 생각한다고 해서 사량식(思量識)이라고도 한다. 또한 제칠말나식 밑에 모든 경험을 간직하고 생명을 유지하며 모든 행위를 발생시키는 근원적인 마음의 존재를 발견해 내었다. 이를 제팔아뢰야식(阿賴耶識)이라고 하는데,모든 경험을 저장한다는 뜻에서 장식(藏識) 또는 모든 식의 뿌리가 된다는 뜻에서 근본식(根本識)이라고 한다.
유식불교는 초기불교 이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였던 심(心)의(意)식(識)을 분리하여 심은 아뢰야식 의는 말나식 식은 육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분류하였다. 유식불교는 이처럼 마음을 여덟가지 중첩된 구조로 파악하여,표층의 마음이 심층의 마음을 훈습(薰習:향기가 베어들어 스미는 것 같다고 하는 의미)하고 훈습된 마음에 따라서 표층의 마음이 현상으로서 드러난다(이를 現行이라고 함)고 한다.
이처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인(因)이 되고 과(果)가 되는 마음전개의 방식에 의해서 자기의 현실적 존재모습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유식불교의 특징이다. 그런데 유식불교는 마음의 근본이 되는 아뢰야식의 성질을 망식(忘識)이라고 규정한다.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현실의 미혹한 자기의 모습이 전개되는 과정을 연역적으로 일관되게 해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유식설에서는 망식인 아뢰야식을 멸하는 것에 의해서 지혜를 얻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에, 미혹으로부터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길이 비연속적이라는 논리적인 난점이 있다.

한편 참된 자기의 모습 즉 이상적 자기의 모습을 가장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불교사상은 여래장(如來藏)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여래장사상은 현실적인 번뇌와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모든 중생이 여래장임을 선언한다. 여래장은 여래가 될 씨앗을 의미하기 때문에, 인간의 궁극적인 모습이 여래와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본질적으로 부처와 동일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고(一切衆生悉有佛性) 있는 것이다.
여래장설에서는 모든 중생의 본질적인 모습이 깨끗한 것(自性淸淨心)이지만 외래적인 번뇌에 의해 오염되어 있다(客塵煩惱染)고 본다. 비유하면 금덩어리가 먼지에 뒤덮혀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먼지는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쉽게 치워질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먼지에 가리워 있지만 금덩어리의 빛나는 성질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대로 있는 것이며, 먼지가 치워지면 곧 빛나는 금덩어리의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으로서의 번뇌는 단지 외래적인 것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번뇌와 괴로움에 휩싸여 있는 현실적인 자기의 모습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 제약적 현실에 절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여래장설은 일깨워주고 있다.
한편 여래장설에서 중생과 부처와의 본래적 동일성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찾고 실현해야할 이상적인 자기의 모습으로서의 부처가 현실적인 자기와 단절되어 있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여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줌으로써 여래를 지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래장설은 미혹한 현실을 벗어나서 깨달은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당위성과 가능성을 확신하게 해 준다는 점에 강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기체 안에 무명이 존재함을 결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본래적으로 깨끗한 모습이었던 자기가 어떻게 해서 더러운 모습을 짓게 되었는가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지 못하는 난점이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유식설은 미혹한 현실의 자기 모습을 논리적으로 해명하는데 강점이 있고 여래장설은 깨달은 자기의 모습을 회복해야 하는 실천적 요청에 잘 부응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설명의 출발점을 중생이라는 현실에서 잡느냐 아니면 부처라는 이상에서 잡느냐의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현실에 대한 이론적 설명과 깨달음으로 향하는 실천적 요청 그 어떤 쪽에 비중을 두고 역설하느냐는 강조점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 대승기신론의 자기이해

대승기신론은 유식사상과 여래장사상을 정합적으로 잘 종합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이론과 실천을 총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미혹한 자기의 모습에 대해서 마음이 오염되는 과정을 단계별로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염된 마음을 정화시켜 깨끗한 자기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하는 당위성과 그 과정을 설득력있게 잘 제시하고 있다.

가. 화합식으로서의 아뢰야식
대승기신론은 중생의 입장에서 다양한 변화의 모습을 탐구해 나가는 데 중점이 놓여 있기 때문에 마음의 변화하는 모습(心生滅)을 해명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미혹해서 괴로움의 세계로 떨어지거나 수행을 통해 깨달음으로 나아가거나 모든 변화의 단초는 아뢰야식에서 찾을 수 있다. 아뢰야식에는 우리들 경험의 일체가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 우리들 경험의 일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불생불멸(하는 마음)과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화합하여 있으면서, 같지도 않고(非一) 다르지도 않은(非異) 것을 아뢰야식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 “마음의 생멸하는 모습은 무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생멸하는 마음은 본각으로부터 일어나므로, 두 개의 본체가 있다거나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화합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생멸하는 마음 자체에 의지하여 움직임이 있으므로 마음은 생멸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지만(非異), 생멸하지 않는 성질을 잃지 않으므로 마음은 생멸과 같지 않다(非一). 즉 생멸과 불생멸이라는 두 개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본체는 같다는 의미에서 非異이고, 양자는 성질이 다르고 존재방식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非一이다. 그러므로 화합은 불생멸과 생멸이 같을 때나 다를 때는 있을 수 없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을 때만 성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승기신론의 아뢰야식은 動과 靜 뿐만 아니라 染과 淨을 모두 포함하고 있고, 覺과 不覺의 뜻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뢰야식 안에는 깨달음의 계기가 되는 眞如인 여래장과 더불어 미혹의 계기가 되는 무명이 함께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의 아뢰야식은 眞忘和合識이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
미혹하여 생사의 고통에 묶여있을지라도 마음의 본성인 진여를 반복해서 익힘으로써 미혹(不覺)으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깨달음(始覺)을 얻을 수 있다. 그러한 향상적 전환이 가능한 것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여 본래 깨달은 상태(本覺)에 있기 때문이다. 시각은 중생이 실천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향해 노력해야 하는 방법과 당위성을 제시한 것이라면, 본각은 인간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킴으로써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을 확고하게 보장해 주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기신론의 시각과 본각이라는 구조는 여래장이라는 개념만으로 인간에게 여래가 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보다는 한층 더 깨달음의 의미를 인간에게 가까운 것으로 부각시키는 효과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혹의 세계는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관해서 기신론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뢰야식 안에 자리하고 있는 무명에 의해 마음에 움직임이 일어나면(業識) 주관의 작용이 나타나고(轉識) 객관세계가 나타나며(現識) 외계의 존재가 실재한다고 판단해서(智識) 끊임없이 분별을 일으키게 되는 데(相續識)까지 이르게 되는데, 이처럼 여러 식의 생멸이 서로 모여 발생하므로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록 중생의 마음이 이처럼 여러 가지 모습으로 전개되지만 그 본체는 하나인 것이며 본성이 지닌 신통하게 이해하는 본성은 각각 지니고 있으므로 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생이 끊임없이 잘못된 생각과 집착을 가지고 분별함으로써 번뇌와 괴로움을 야기하는 나락의 길로 빠져들어 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흐름이 되돌릴 수 없는 절망이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승기신론은 무명과 진여를 모두 아뢰야식 안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미혹한 현실세계의 전개과정과 깨달음에로의 전환을 모두 용이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는 유식설에서 아뢰야식의 성질을 망식으로 규정해서 깨달음에로의 전환에 비연속이라는 문제점이 있는 것과 대조된다. 또한 마음의 기체 안에 무명이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여래장설과 달리 차별적이고 생멸하는 미혹한 세계가 전개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이 없게 된다. 결국 대승기신론은 유식설이 지니는 장점을 취해서 여래장설의 문제점을 해소하고, 여래장설이 지니는 장점을 취해서 유식설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두 사상을 종합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나. 이문일심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며, 그 마음 가운데 일어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경험하는 모든 세계는 마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괴로운 자기의 모습과 깨친 부처의 모습 역시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항상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승기신론은 마음의 세계를 마음의 본래 있는 그대로의 모습(心眞如門)과 움직이고 변화하는 모습(心生滅門)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심진여문은 변화와 차별이 없는 평등한 부처의 마음세계이고, 심생멸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차별하는 중생의 마음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은 두 마음세계의 특징과 관계 그리고 서로 통하는 과정을 상세히 논하고 있다.
기신론은 진여문에 대해서 모든 것을 실재시하는 분별이 없어 텅 비어 있지만(如實空) 무한한 선행을 할 수 있는 잠재성을 갖추고 있다(如實不空)고 설명하고 있다. 생멸문에 대해서는 앞서 아뢰야식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생멸하는 불각의 모습과 불생불멸하는 각의 모습을 함께 포함시키고 있다. 이러한 의미부여를 바탕으로 해서 기신론은 이 두 가지 마음의 모습이 각각 한 마음(일심)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기신론의 특징이 있다.
마음의 두 가지 모습을 떠나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적 존재로서의 일심이 두 모습에 우선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일원적인 일심으로부터 이원적인 이문이 발생되는 것이 아니고, 이문을 합해서 일심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일심은 이문을 계기로 하여 성립하는 것이고 이문은 일심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문과 일심을 분리된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정의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두 문이 각각 한 마음이 아닌 서로 다른 실체로서 존재한다든가 통하지 않은 부분으로 존재한다면, 진여문은 항상 온갖 차별상을 떠난 초월적인 본체로서 이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동시에 생멸문은 온갖 차별상으로 나타나는 현실의 세계에만 머무를 것이다. 그러나 기신론의 견해는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두 세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거나 완전히 다른 세계가 아니라 각각이 온전한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이라는 의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은 열어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열어서 통하게 하면 각각 자기의 세계 안에 갖혀 있지 않고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래서 진여문은 진여문대로 생멸문은 생멸문대로 모든 것을 포섭하는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기신론은 두 문 각각이 모두 한 마음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을 뿐, 일심이라는 실체를 상정하고 그것을 둘로 나누어 보고 있지 않다. 원효가 이문일심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는 이유도 일심이문이라고 말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해를 막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심이문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심으로부터 이문이 나온다거나 일심이 이문으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하기 쉽다. 뿐만 아니라 일심을 발생론적인 근원이나 궁극적 실체라고 생각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문일심이라고 할 경우에는 일심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문을 통해 일심이 나타나고 이문이 각각 일심이라는 뜻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기신론의 이문일심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은 평등한 세계나 미혹한 차별의 세계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계가 아니라 각각 온전한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각각의 세계가 서로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통할 수 있고 걸림없이 오갈 수 있는 세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진속의 융통무애
심진여문을 평등한 부처의 세계요 이상의 세계로서 眞이라고 한다면, 심생멸문은 중생의 세계요 현실의 세계로서 俗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신론은 그 저술목적이 진과 속이 별개의 것이라고 하는 집착을 다스리는 데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신론은 이문으로 표현되는 두 세계가 서로 단절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통하는 모습과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고, 여기에 기신론의 기신론다운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생멸문의 분별심이 작용해서 무명을 버리고 진여를 추구하게 되면 일심의 본원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면 모든 분별과 망념을 깨뜨리고 모든 차별상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평등한 진여문의 세계와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속에서 진에 이르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融俗爲眞). 또한 진여문에서는 일체의 분별을 하지 않으므로, 진여가 생멸과 다르고 우월하다는 분별과 집착(根本無明)까지를 버리게 된다. 진여가 우월하다는 집착을 버리게 되면 불변인 진여문에 머무르지 않고 생멸의 세계로 나오게 된다. 이것이 진에서 속으로 나오는 모습이다(融眞爲俗). 이와 같이 진여문과 화합해서 생멸의 세계로 나오게 되면, 아무런 분별과 행위도 하지 않는 적멸에 머무르지 않고 상황에 따라 적절한 판단과 행위를 할 수 있는 지혜(世間自然業智)가 동반된다.
이상과 같이 대승기신론에서는 속에서 진으로 또 진에서 속으로 진과 속이 걸림 없이 오갈 수 있는 모습을 설득력 있게 그리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이 이렇게 진과 속의 융통을 역설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진은 어디까지나 진이고 속은 어디까지나 속에 그치는 것이라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괴로움에 쌓여 있는 현실의 중생이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과 노력을 시작하는데 그러한 판단과 노력 역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런 노력 역시 무가치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전락한다. 또한 깨달음을 얻어 이상적인 부처의 세계에 영원히 머무를 뿐이라면 깨달음은 현실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만다. 진과 속이 융통하고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을 향한 지향이 정당성을 갖게 되고, 확립된 이상이 속에서 구현됨으로써 이상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맺는 말

두 개의 자기가 있다. 하나는 아집으로 인해 괴로운 현실을 살고 있는 중생으로서의 자기이고, 또 하나는 모든 망념과 집착을 버린 곳에 드러나는 본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이상적인 부처로서의 자기이다. 대승기신론은 이 두 개의 자기가 어떤 모습으로 있고 또 어떻게 상통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중생과 부처는 서로 질적으로 다르거나 단절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생 속에 부처가 공존하고 부처 역시 중생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대승기신론은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두 개의 자기는 모두 하나의 마음 안에 있다.


<참고문헌>

馬鳴,,『大乘起信論』,大正 권32.
Yoshito S Hakeda,"The awakening of faith,Columbia Press.
元曉,『大乘起信論疏』,『大乘起信論別記』,한국불교전서 1책.
太賢,『大乘起信論內義略探記』,한국불교전서 3책.
高翊晋,「원효의 기신론소별기를 통해 본 진속원융무애관」,불교학보 10집.
中村元,『自我と無我』,平樂寺書店,1981.
勝又俊敎,『佛敎 におけゐ心識說の 硏究』,永田文昌堂,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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