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율|론 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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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묻는다면

명상수행의 바다

 

 

 

 

 

 

 

인도의 고대사에서 연대기는 거의 밝혀져 있지 않다. 밝혀진 것조차 언제나 뒤집힐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인도학자 휘트니(W.D.Whitney)는 인도 고대사의 연대기를 '다시금 넘어지기 위하여 세워진 볼링 핀'으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고따마 붓다가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시에서 돌아가신 이후 직제자 500명이 칠엽굴에서 모여서 마하 깟싸빠를 상수로 하고 존자 아난다를 경전에 대한 송출자로 하여 경전을 결집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결집이다. 25년간 부처님을 곁에서 모셨던 아난다는 그 탁월한 기억력으로 부처님의 말씀, 대화, 담론이 이루어진 연유, 때와 장소 및 정황, 그리고 내용 등을 빠짐없이 송출했다. 그가 송출한 내용은 참가한 모든 제자들에 의해서 검증되고 합송되었고 규정된 언어형식을 빌어 구전으로 전승되었다.

 

입에서 입으로 - 구전(口傳)의 전통과 구전의 정확성

당시에 문자로 기록되지는 않았다. 당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문자의 기록도 없다. 왜냐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 즉 구전으로 내려온 것을 문자로 전승된 것보다도 확실하고 신뢰할만한 것으로 여기는 고대 인도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라문교를 비롯하여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인도의 학파들이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기억을 최상의 것으로 삼았던 데는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문자로 쓰여진 것은 사람들이 단어를 잘못 강조하거나 문장을 잘못 나누거나 문장을 잘못 베껴 쓰게 되면 너무도 쉽게 내용이 바뀔 수가 있지만, 배운 바대로 암송하면 올바른 억양과 리듬, 올바른 배열을 통해서 문장의 내용을 충실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에서 입으로 전할 때는 자신이 들은 내용을 리듬이나 억양까지 살려서 가장 충실하게 옮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타난 구전적인 특성은 이러한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특히 빠알리어의 경우 이러한 특성이 대단히 두드러진다. 어떤 부분에서는 문법적인 오류가 명백한데도 그대로 구전되어 내려오는 것을 볼 때, 말씀을 설해진 그대로의 원형으로 보존하는데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 고대의 구전들은 마치 녹음기에 녹음한 것처럼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빠알리어로 된 경전들은 진실한 부처님 말씀이라고 분명히 받아들여도 좋은 것이다.

 

알리 삼장의 결집과 성립

빠알리 삼장(三藏)은 띠삐따까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세 분야, 즉 율장, 경장, 논장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빠알리 삼장은 스스로 '분별설부'라고 부르는 상좌부(테라바다)의 경전이다.

전통에 따르면, 경전의 편집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이후인 B.C. 483년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 결집에서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00년 뒤 베쌀리 결집에서 더욱 보완되었다. 그 모임은 계율의 완화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 후 아쇼까왕(B.C. 264-227) 아래 세 번째 결집에서 주요한 경전이 형식적으로 완료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특히 그 결집에서 장로 띳싸 목갈리뿟따가 전승에 따라 논사를 강의함으로써 논장의 형성이 이뤄졌다. 이 책은 252가지의 사견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으며, 논장 속에 편입되어 있다.

이 세 번째 결집은 불교를 이웃 나라에 전파하려고 포교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전승은 흥미롭게도 비문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아쇼까왕의 아들 마힌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전하는 포교사로 스리랑카에 파견되었으며, 그는 스리랑카에 상좌부에서 만든 경전을 전하였다.

한편, 경전이 점차적으로 성립하자, 각각의 사원마다 붓다의 가르침과 대화를 발굴하는 대로 될 수 있는 한 모두 결집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경전의 첫머리는 항상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나에게는 이와 같이 들려졌다.)'로 시작된다.

결집과 같은 큰 모임에서 개개의 경전이 승인되거나 검증되었다. 이렇게 해서 경전의 자료는 점점 증가하게 되고 일정한 모음집의 형태로 분류되었다. 이러한 결집의 형성으로부터 우리는 처음부터 학파나 부파의 존재가능성을 추측해볼 수 있다. 두 번째 결집을 계기로 하여 이러한 경향은 더욱 노골화되었고, 교파의 갈등, 즉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로 나타났다.

 

경전의 대부분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200년 안에 편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B.C. 3세기 경의 비문에 발견되는 명칭인 '담마까티까', '뻬딴낀', '쑤딴띠까', '빤짜네까이까' 등은 당시에 벌써 경전이 후세와 같은 분류형태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쇼까왕이 바브라 비문에서 추천한 일곱 가지 교재 가운데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의 책은 분명히 빠알리경전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불교도들이 매우 흠모해 마지 않았던 아쇼까왕이 실제 빠알리경전에서는 어디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는 빠알리어경전에 아쇼까왕 때에는 내용적으로 이미 거의 완성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믿을 만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했다고 보여지는 '마하방싸'와 '디빠방싸'에 따르면, 스리랑카에서는 기원전 수십 년 전에 밧따가마니왕 아래서 삼장과 그에 속한 주석서들이 문자로 수록되었다고 한다.